
[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현존하는 국내 배우 중 가장 신뢰받는 배우는 어쩌면 오정세가 아닐까. 주연이든 아니든 오정세가 연기한 작품은 대중에게 묘한 위로와 공감을 안긴다. 완성도는 높고 유머와 힐링이 공존한다. JTBC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도 그 궤를 같이한다.
극 중 오정세는 지질한 영화감독 박경세 역을 맡았다. 다섯 편의 영화를 연출했음에도, 여전히 황동만(구교환 분)의 날 선 공격에 치명상을 입는 인물이다. 평온한 얼굴로 보듬어 줄 수도 있을 법한데, 모든 말에 온몸이 긁혀 비명을 지른다. 그 찌질하고 지난한 과정이 질리기도 하면서 묘한 러블리함을 불러일으킨다.
오정세는 최근 스포츠서울과 만나 “캐릭터를 아예 안 보는 건 아니지만, 이번 작품은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고 싶었다. 아마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싶다”며 “문장 한 줄 한 줄이 모두 귀했다. 동만과 은아가 서로 응원하며 성장하는 이야기인데, 그 험난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에 나도 함께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박경세는 철없고 찌질한 구석이 다분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용기 있게 고백할 줄 아는 인물이다. 오정세는 이 캐릭터에 과거 ‘동백꽃 필 무렵’을 함께 했던 차영훈 감독의 모습을 슬쩍 투영했다.
“차영훈 감독님은 큰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면서도 배우나 스태프가 기뻐할 때 누구보다 먼저 엉엉 울고 고마워하더라고요. 참 사람 냄새나는 분이에요. 경세가 동만의 영화를 보며 응원하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낄 때, 차 감독님으로부터 시작된 정서를 많이 가져오려 했습니다. 연기가 뭔가 풀리지 않을 때면 차 감독님을 관찰하고 때론 묻기도 했어요. 덕분에 쉽게 풀린 순간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이름 석 자만으로 묵직한 신뢰를 주는 ‘믿고 보는 배우’가 됐지만, 마치 극 중 인물들이 무가치함과 치열하게 싸우듯 그에게도 조단역을 전전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걷던 시절이 있었다. 그럼에도 오정세는 단 한 번도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여긴 적이 없다.
“이 직업은 좋다가도 안 좋아지는 사이클이 계속 반복돼요. 일희일비하면 지쳐서 상처만 남죠. 그래서 전 잘됐을 때 너무 기뻐하거나, 안됐을 때 너무 괴로워하지 않으려 했어요. 오디션에 떨어지면 스트레스는 받지만, 속으로는 ‘나 되게 좋은 배우인데, 나 안 뽑은 너희 정말 괜찮아?’라며 스스로 단단해지려 했어요. 내가 아팠으면 나처럼 떨어진 저분들도 아팠을 테니까요.”

오정세의 연기가 매번 살아 숨 쉬는 이유는 철저한 분석 위에서 자신만의 변주를 꾀하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방대한 양의 대사를 온전히 시청자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과 싸워야 했다.
“초반엔 대사를 100%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전달하는 게 1차 목표였어요. 하지만 촬영을 하다 보니 장문 안에 갇혀 도리어 자유로움을 잃더라고요. 그래서 ‘98%만 구현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죠. 얽매임에서 벗어나니 오히려 정서가 더 깊게 배어 나왔습니다.”
인터뷰 내내 그가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단어는 ‘정서적 배부름’이었다.
“극 중 황동만이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감정워치에 ‘허기’라고 떠요. 반대로 이렇게 좋은 드라마를 끝내고 나면 제 마음속엔 든든한 정서적 배부름이 남습니다. 되게 오래 버틸 수 있는 훌륭한 양분이 되죠. 세상 모든 것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너무 힘들거나 괴로워하지 말고 연기하면서 늙어 죽을 때까지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오정세의 변신은 장르를 불문하고 쉼 없이 이어진다. 최근 화제를 모은 영화 ‘와일드씽’에서는 단발 대신 긴 머리를 휘날리는 멧돼지 사냥꾼으로 등장해 압도적인 화제성을 낳았다. 현재 방영 중인 MBC 드라마 ‘오십프로’에 이어 내년에는 장기용과 함께 흙수저들의 끈적한 생존 전략을 그린 현실 오피스 드라마로 시청자들을 찾는다. 두 개의 심장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폭발적인 활동량이다. 지치지 않는 비결은 일상 속 소박한 여유와 현장 자체에서 얻는 에너지 덕분이다.

“생일 파티에서 제가 주인공이 돼 축하받는 걸 유독 쑥스러워하는 성격이라 대중의 뜨거운 관심에 위축되기도 하지만, 그저 감사한 마음이 가장 큽니다. 애초에 시작부터 오랫동안 연기하는 걸 목적으로 달려왔어요. 계속 좋은 작품을 만나면서 연기를 즐겁게 이어가고 싶습니다. 낮은 자세로 계속 열심히, 잘하겠습니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기사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