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글·사진 | 화성=원성윤 기자] ‘술을 빚던 공간’에서 ‘문화를 빚는 공간’으로.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빽빽한 고층 아파트 단지 사이에 묘한 시간의 경계가 존재한다. 1986년부터 국순당의 막걸리가 익어가던 옛 화성 양조장 터가 세련된 현대식 건축물과 어우러진 ‘비밀의 숲’으로 재탄생했다. 이곳은 국순당이 100억 원 이상을 투입해 일군 혁신 거점, ‘박봉담’이다. 뼈대만 남은 낡은 공장의 철골 구조 아래, 철저히 성인의 취향과 ‘쉼’에 집중하기 위해 흔한 어린이 의자나 유모차용 엘리베이터조차 과감히 비워냈다.
◇ “어린이 의자는 없습니다”…취향을 박제한 ‘성인 전용’




박봉담은 노키즈존은 아니지만, 사실상 성인들의 ‘감각적 해방구’를 지향한다. 옛 공장의 흔적을 세련되게 재해석한 ‘봉담 키친’에는 창 너머로 볼 수 있는 중정, 벽장에 가득 채워진 과거 공장의 모습을 갤러리 형식으로 꾸려 인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2층 테이스팅 룸으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은 일상과의 단절을 선언하는 일종의 의식이다. 노출된 금속 골조의 옛 공장 구조물 사이로 오르는 계단 끝에는 박봉담의 핵심, 테이스팅 룸이 기다린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프랑스 하이엔드 오디오 ‘드비알레’의 웅장한 사운드가 고막을 채운다. 창밖의 자연 풍경 하나까지 치밀한 계산으로 배치했고, 가구 하나하나를 독자적으로 제작했다. 카페인 줄 알고 들어왔던 이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술의 매력에 빠져들게 만드는 국순당식 ‘공간 마케팅’의 정수다.
◇ 7년의 집착이 빚은 ‘바이오 농장’…상추조차 과학이다




박봉담에는 방진복을 입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수직형 스마트팜이 있다. 빽빽하게 채워진 선반 위로 분홍빛 LED 조명이 빛나는 스마트팜 내부는 국순당의 원재료에 대한 집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술을 빚던 미생물 제어 기술을 식물 생육에 그대로 이식한 것이다.
이곳의 ‘버터헤드’ 상추는 태양광 대신 특수 설계된 LED 파장을 먹고 자란다. 흙 한 줌 없이 수경 재배로 키워낸 채소는 미생물 오염에서 자유로워 냉장고에서 한 달간 싱싱함을 유지한다. 쓴맛은 걷어내고 부드러움만 남긴 이 채소들은 곧장 ‘박봉담 키친’으로 향해, 막걸리 식초로 맛을 낸 피클이나 포슬포슬한 ‘박봉담 술빵’으로 재탄생한다. ‘K-웰니스’가 식탁 위에서 구현되는 현장이다.
◇ 200L 탱크의 반란, ‘둥글둥글한 맛’을 거부하다


거대 공장이 지향하는 ‘대중적인 맛’은 이곳에서 통하지 않는다. 박봉담의 마이크로 브루어리는 200L에서 500L 규모의 소형 탱크를 통해 매달 파격적인 실험을 이어간다. 특히 이곳 테이스팅 룸에서 맛볼 수 있는 샘플러 라인업은 박봉담만의 날 선 개성을 여과 없이 뽐낸다.
가장 기본이자 시그니처인 ‘박봉담 막걸리’는 국순당 연구소가 최적의 향을 만들기 위해 우리 제법을 기반으로 발전시킨 ‘아로마 발효기술’로 빚은 프리미엄 수제 생막걸리이다. 반면 이름부터 경쾌한 ‘쌀쌀 막걸리’는 쌀 본연의 질감을 매력적으로 살려내면서도 산뜻하고 청량한 뒷맛을 자랑해 텁텁한 탁주를 꺼리는 젊은 층의 입맛까지 사로잡는다.
탁주뿐만 아니라 수제 맥주의 완성도 역시 수준급이다. 밀맥주 특유의 부드러움에 향긋한 유자 향을 입힌 ‘박봉담 유자 바이젠’, 쌉싸름한 홉의 매력을 살린 ‘박봉담 알트 비어’, 그리고 구수한 옥수수 향과 팜하우스 에일 특유의 효모 풍미가 절묘하게 섞인 ‘옥수수 세종’까지 취향에 따라 다채로운 미각 여행을 즐길 수 있다.
◇ 50년 창고의 부활, ‘기억의 창’으로 하늘을 담다



공간의 서사도 극적이다. 40년 전 창고의 골조를 그대로 살린 ‘재생 건축’은 박봉담의 품격을 높인다. 세련된 대리석 대신 건물을 허물 때 나온 공장 일부를 인테리어로 썼고, 아스팔트 사이로 돋아난 잡초조차 ‘사유정원’의 일부로 품었다. 야외 정원에는 돌로 만든 등과 세월을 머금은 나무들이 옛 공장의 흔적과 어우러져 있다.
특히 야외 정원 한구석에 자리 잡은 옛 공장 구조물은 박봉담의 역사를 말없이 웅변한다. 천장의 정사각형 구멍은 과거 리프트가 있던 자리를 살려낸 것이다. 눈 내리는 날, 이 구멍을 통해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며 기획자들이 무릎을 쳤다는 ‘기억의 창’이다. 곳곳의 QR코드를 찍으면 국순당 회장님부터 사원까지, 직원들의 목소리로 녹음된 오디오 도슨트가 공간의 역사를 읊어준다.
◇ 100억의 투자가 증명한 ‘문화의 힘’

주말이면 하루 최대 2000명이 이곳을 찾는다. 매출의 40%가 현장에서 술을 구매하는 ‘박봉담 보틀 숍’에서 나올 만큼, 이곳은 이미 단순한 카페를 넘어 ‘우리 술의 성지’로 자리 잡았다.
낡은 공장이 파크(Park)가 되고, 술이 곧 콘텐츠가 되는 박봉담의 도전. 이는 전통주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이정표이자, ‘K-가스트로노미’가 전 세계를 매료시킬 강력한 무기다.
도심 속 아파트 숲 사이, 박봉담은 오늘도 미생물과 식물의 아름다운 합창을 지휘하며 우리 술의 새로운 미래를 빚어내고 있다. socool@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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