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스스로 “한국이 낳은 대문호 김은희 작가의 남편 장항준입니다”라고 소개한다. 아내의 드높은 이름값에 대한 영리한 처세다. 영화계보다는 예능계에서 활약이 더 컸다. “대한민국 가장 웃긴 영화 감독”이라 불릴 정도로 워낙 예능감이 좋아 본업인 영화 감독으로선 빛이 바랬다. 적어도 영화 ‘왕과 사는 남자’ 개봉 전까진 그랬다.
장항준 감독은 예능 프로그램 작가로 방송가에 입문했다가 1996년 ‘박봉곤 가출사건’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당시 백상예술대상 각본상에 노미네이트 됐다. 20대 나이에 대중성과 예술성이 짙은 작품을 써내 영화계의 관심을 받았다. 이어 2002년 ‘라이터를 켜라’(약 130만)까지 동원하며 승승장구했다. 충무로의 신동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운이 이어지지 않았다.

차기작 ‘불어라 봄바람’이 흥행에 실패했고 여러 작품을 시도했지만,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SBS ‘싸인’이 나오기까지 무려 8년이 걸렸다. 반대로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마다 파괴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MBC ‘무한도전’에서 ‘무한상사-위기의 회사원’을 연출했고, SBS ‘꼬리의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개국공신이다. ‘기억의 밤’(2017)은 호평도 많았으나, 커다란 반향은 일으키지 못했다.
2012년 부산중앙고등학교 농구팀을 소재로 만든 ‘리바운드’(2023) 역시 작품성 면에서는 호평이 있었으나, 팬데믹 탓에 70만 관객에 그치며 흥행에 실패했다. 미드폼 영화 ‘오픈 더 도어’(2023)나 이명세, 노덕, 김종관 감독과 함께 한 ‘더 킬러스’(2024) 등 꾸준히 실험적인 시도를 했지만, 작품의 재미에 비해 반응이 크진 않았다.
아무리 실패가 잦았어도 늘 웃는 얼굴과 함께 국내 최고 작가의 남편이라는 덕에 늘 ‘인생은 장항준처럼’이란 말이 지워지지 않았다. 영화에서 큰 성공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인간미이기도 했다. 그러나 더이상 장 감독의 인생에 결핍은 없어 보인다.

공동 각본으로 출발해 연출을 맡은 ‘왕과 사는 남자’가 1000만 관객을 돌파했기 때문이다. 5주차임에도 주말 관객이 70만을 넘는 등 반응이 뜨거워서 무서운 기세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데뷔 30년 만에 국내에 약 20명 정도 밖에 없는 ‘천만 감독’ 반열에 올랐다.
예능감이 뛰어나긴 하나 대체로 정극에서 활약한 장 감독은 ‘왕과 사는 남자’에서 단종의 무기력과 영월 사람들의 순수한 연대를 섬세하게 표현했다. 특히 단종의 눈에 담긴 슬픈 얼굴은 이 시대 무력감을 느끼는 대중의 심장을 관통했다. 슬픔을 온전히 표현하지 않고 망자에 대한 예우와 존중을 다한 연출 덕에 대중이 느끼는 감동과 전율은 배가됐다. 장 감독 특유의 긍정과 인류애가 메가 히트의 핵심이었던 셈이다.

‘리바운드’ 첫날 스코어를 보고 너무 실망해서 펑펑 울었다는 장 감독은 ‘왕과 사는 남자’로 완벽히 우뚝 섰다. 대중 앞에서는 늘 깃털처럼 가벼워 보였으나, 메가폰을 쥔 그의 이면에는 영화를 향한 지독한 애정과 끈질긴 연구가 숨어 있다. 3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여정, 단 한 순간도 영화를 향한 짝사랑을 게을리하지 않은 그 순수한 노력이 결국 ‘천만 감독’의 찬란한 반열로 이끌었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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