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룩왕’ 故 배상면 회장의 낡은 실험 일지가 말하는 ‘혁신’

- 석유 파동이 낳은 ‘생쌀발효법’, K-술의 표준이 되다

- “기술 독점 대신 공유”… 시대를 앞서간 ‘오픈 이노베이션’ 정신

K-푸드가 일시적 유행을 넘어 글로벌 식문화의 ‘장르’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저변에는 수천 년간 축적된 한국 고유의 ‘발효 과학’이 있습니다. 스포츠서울은 맛의 근원인 장(醬)과 김치, 전통주, 그리고 헬스케어(웰니스)에 이르기까지, 발효 기술을 무기로 세계 시장을 개척하는 기업들을 매주 집중 조명합니다. 전통을 현대화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K-발효’의 혁신 현장을 따라가 봅니다. <편집자주>

[스포츠서울 글·사진 | 포천=원성윤 기자] 경기도 포천 운악산 자락에 위치한 배상면주가의 전통술 갤러리 ‘산사원’. 그곳의 한 벽면 앞에 서면 누구나 숙연해진다. 빛바랜 모눈종이 위에 깨알같이 적힌 숫자들, 삐뚤빼뚤하지만 정교하게 그려진 실험 도구 스케치, 그리고 수없이 고쳐 쓴 흔적들. 평생을 ‘누룩’과 씨름했던 ‘우곡(又麴·또 누룩을 생각한다는 뜻)’ 배상면 회장의 치열했던 연구 노트다.

이 낡은 종이 쪼가리들이 오늘날 한국 전통주 시장을 지탱하는 거대한 뿌리가 되었다면 믿어지는가. 배상면주가의 태동은 단순한 술 만들기가 아닌, 위기를 기회로 바꾼 ‘혁신’과 기술을 독점하지 않은 ‘나눔’의 역사였다.

◇ 석유 파동이 낳은 역발상, ‘생쌀발효법’의 탄생

전시관 한편에 놓인 거대한 술독들이 뿜어내는 향기 뒤에는 1970년대의 절박한 시대상이 숨어 있다. 당시 한국은 석유 파동(오일 쇼크)으로 에너지 절약이 지상 과제였다. 술을 빚기 위해 쌀을 찌는(증자) 과정에 들어가는 연료비는 양조장들에게 엄청난 부담이었다.

“쌀을 찌지 않고 술을 빚을 순 없을까?”

남들은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을 때, 배 회장은 헌책방을 뒤졌다. 그리고 고문헌 속 ‘백하주법’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생쌀을 가루 내어 술을 빚는 방식. 수없는 실패 끝에 그는 현대적인 ‘생쌀발효법’을 완성해냈다. 벽면에 전시된 그래프와 실험 데이터는 그 치열했던 산고의 기록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연료비를 아끼려 시작한 연구였지만, 쌀을 찌지 않으니 열에 의한 영양소 파괴가 적었고, 무엇보다 숙취의 원인인 ‘아세트알데하이드’ 생성량이 기존 방식의 6분의 1로 줄어들었다. ‘뒤끝 없는 술’의 대명사 산사춘과 백세주(국순당)의 신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 “나 혼자 잘 살면 무슨 재민겨”… 시대를 앞선 공유 정신

산사원 2층에는 널찍한 강의실과 나무 책상들이 놓여 있다. 그리고 진열장에는 ‘전통주 제조기술’, ‘조선주조사’ 등 배 회장이 직접 집필하고 펴낸 두꺼운 전공 서적들이 꽂혀 있다.

배 회장의 진짜 위대함은 기술 개발 그 이후의 행보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피땀 흘려 개발한 ‘생쌀발효용 특수 누룩’과 양조 기술을 특허로 묶어 독점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만 잘살지 말고, 남들도 술 빚게 도와줘라”며 기술을 활짝 열었다.

그는 양재동 사옥에 배상면연구소를 차리고, 전국에서 올라온 양조인들에게 2주간 무료로 술 빚는 법을 가르쳤다. 지방에서 온 사람들에겐 숙박비까지 쥐여 보냈다. 오늘날 경영학에서 말하는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과 ‘ESG 경영’을 수십 년 앞서 실천한 셈이다. 산사원 곳곳에 붙어 있는 “개방과 융합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는 미션은 단순한 구호가 아닌, 그의 삶 그 자체였다.

◇ 도심형 양조장 ‘느린마을’, 혁신의 유산

생쌀발효법이라는 기술 혁신은 공간의 제약도 무너뜨렸다. 쌀을 찌기 위한 거대한 보일러 설비가 필요 없어지자, 양조 장비의 소형화가 가능해졌다. 이는 오늘날 강남 등 도심 한복판에서 매일 신선한 막걸리를 빚어내는 ‘느린마을 양조장’이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이어졌다.

전시관 말미, “나는 일요일, 토요일이 고민입니다. 가서 책도 못 보지, 실험하는 경과도 못 보니까… 죽을 때까지 일하다 죽을 겁니다”라고 적힌 배 회장의 문구가 발길을 잡는다.

술은 농업이어야 하고, 기술은 나누어야 한다는 그의 고집스러운 철학. 포천 산사원은 단순한 술 박물관이 아니다. 위기 속에서 혁신을 찾고, 그 과실을 기꺼이 이웃과 나누었던 한 ‘진짜 어른’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우리 시대 기업가 정신의 성지(聖地)다. socool@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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