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이주상 기자] “얼마나 찬란하고 또 허망한가.”
화가 정상곤이 자연 앞에서 토로하는 이 한 마디에는 생명에 대한 경외와 연민이 동시에 담겨 있다. 운중화랑이 오는 17일부터 11월 15일까지 선보이는 정상곤 개인전 ‘찬란한 그러면서 허망한(Radiant Yet Ephemeral)’은 작가가 최근 2년간 준비한 회화 작품 20여 점을 통해 자연과 생명의 본질을 탐구한다.
정상곤은 작업실 인근 대지산을 산책하며 접한 풍경을 화폭에 담아왔다. 그의 시선은 산의 내부로 직진하며, 나무와 덤불 숲이 바닥과 함께 어질하게 밀려온다. 특정 장소가 뿜어내는 현장감을 그림의 즉흥성으로 풀어내는 작가는 언어나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순간들을 포착한다.
전시 서문을 쓴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는 “작가는 가능한 의미와 해석을 거부하고 물질과 체험의 차원에서 그리고 있다”며 “산책길에서 접한 자연, 생명체에서 자신을 흔드는 ‘시적인 순간’을 포착한다”고 설명했다.
정상곤의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빠르고 격정적인 붓질이다. 꿈틀대는 붓질과 예리한 선들이 어지럽게 횡단하며, 마치 화면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나무줄기들이 춤을 추듯 뻗어나가는 날카로운 선들은 동양화의 필력과 기운생동을 연상시킨다.
그는 제한된 몇 가지 색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중화된 색채의 더미 속에서 풍경은 출렁이고, 구체적인 대상은 질료로 환원되어 흩어진다. 구상과 추상이 뒤섞이고 이미지와 질료가 혼재된 그의 풍경화는 2차원의 평면을 동적이고 생성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박 교수는 “모든 자국은 특정한 움직임의 기억을 담고 있다”며 “이 자국은 대상으로부터 촉발된 인상과 감정을 포착하려는 자취이자, 보고 느낀 것을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시도의 몸짓”이라고 분석했다.
정상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은 ‘변화와 영원의 모순’이다. 자연은 수시로 변모를 거듭하면서도 영원히 불변한다. 작가는 이 모순이야말로 인간에게 중요한 생의 논리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유난히 붉거나 검은 흙에서 나온 풀들, 그 사이에 흩어진 자연은 수시로 변모를 거듭하면서도 영원히 불변한다. 돌멩이 사이사이에 우리들의 살과 피가 먼지가 되어 스며있고, 우리들의 삶과 영혼이 스며있다”는 작가의 말은 그의 풍경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독해하게 한다.
세상은 고정시킬 수 없고 생성 중이며 운동 중이다. 작가는 나무의 살아있는 상태와 힘의 동세, 생성 중인 시간을 그리고자 한다. 수시로 떨어대는 세계를 고정된 화면 안에 온전히 응고시킬 수 없기에, 그는 그 흐름과 운동, 기운을 더듬어 다시 보여준다.
1983년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한 정상곤은 1990년부터 2024년까지 총 49회의 개인전을 열어온 중견 작가다. 특히 판화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1998년 에스토니아 탈린 국제판화 트리엔날레, 1999년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국제판화 비엔날레, 2018년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국제판화 트리엔날레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은 물론 영국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 에스토니아 국립미술관,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국립미술관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온 몸의 감각으로 그리는 그림, 빛깔과 색채의 언어로 말하는 그림, 즉흥적 붓질이 주는 유쾌한 속도감, 정상곤의 작품에는 디지털 문명에 떠밀려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들을 조용히 끄집어내는 서정성이 깃들어 있다.
감성과 어우러진 붓질이 만들어낸 우연한 형상들은 회화적 멋을 한층 끌어올리며 풍경 너머 그림 속 세상을 만들어낸다. 감각적인 그리기와 지우기에서 드러나는 긴장과 여유로움은 현대인에게 잠시 멈춤의 시간을 선물한다.
박 교수는 “그의 그림은 대단한 힘으로 서 있지만 동시에 적막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며 “그것은 풍경에 대한 모종의 연민 의식, 소멸과 사라짐, 우연성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자 모든 생명체에 바치는 애도”라고 평했다.
정상곤 개인전 ‘찬란한 그러면서 허망한(Radiant Yet Ephemeral)’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화랑에서 10월 17일부터 11월 15일까지 열린다. 관람 시간은 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일요일과 월요일, 공휴일은 휴관한다. 오프닝 리셉션은 10월 17일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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