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정동석 기자] 2026년 4월 26일 고척 스카이돔의 공기는 유독 묘했다. 한 시대의 마침표를 찍는 은퇴식의 아쉬움과,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159km의 강속구가 공존했기 때문이다. 키움 히어로즈가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거둔 262일 만의 스윕 시리즈는 단순한 승리 그 이상의 ‘역사적 교차점’이었다.

◇ 거포의 마지막 뒷모습, 그리고 19세 소년의 ‘광속구’
경기에 앞서 열린 박병호 코치의 은퇴식은 영웅 군단 팬들에게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민 거포’의 퇴장은 팀의 큰 기둥이 사라지는 듯한 허전함을 남겼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마운드에 오른 ‘전체 1순위’ 고졸 루키 박준현(19)은 그 허전함을 단숨에 ‘경탄’으로 바꿨다.
데뷔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배짱이었다. 초구부터 삼성 타자들의 배트를 압도한 박준현의 직구는 전광판에 159km를 새겼다. 숫자가 증명한 위력은 결과로 이어졌다. 5이닝 무실점. 역대 13번째 고졸 신인 데뷔전 선발승이라는 대기록은 그렇게 박병호의 은퇴식 날, 마치 운명처럼 쓰여졌다.

◇ 262일의 기다림을 끝낸 ‘시스템 야구’의 승리
키움이 무려 262일 만에 스윕 시리즈를 달성한 비결은 ‘데이터와 헌신’에 있었다. 주전들이 부상으로 쓰러진 최악의 전력 속에서도 설종진 감독은 루키를 믿었고, 불펜진은 무실점 릴레이로 응답했다.
특히 9회말 2점 차의 긴박한 상황에서 몸을 날려 안타를 지워낸 트렌턴 브룩스의 호수비는 이 팀이 오늘 경기를 대하는 태도를 보여줬다. “전설(박병호)을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선수단의 응집력이 데이터 이상의 시너지를 낸 것이다.
◇ 승리의 환호 뒤에 가려진 ‘부상’이라는 그림자
물론 완벽한 드라마에도 위기는 있었다. 타선의 핵심 역할을 해주던 박수종이 8회말 헤드샷 부상으로 병원으로 이송되는 장면은 고척돔을 순간 정적에 빠뜨렸다.
승리의 기쁨은 크지만, 키움 앞에는 박수종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하지만 오늘 박준현이라는 ‘새로운 엔진’을 발견한 것처럼, 위기 때마다 새로운 영웅을 길러냈던 키움의 ‘화수분 시스템’은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 영웅의 전설은 멈추지 않는다
박병호가 남긴 유산은 단순히 홈런 기록이 아니다. 위기 상황에서도 묵묵히 제 몫을 다하며 팀을 지켰던 그 정신이다. 오늘 데뷔전 승리를 거둔 박준현의 당당한 어깨에서 우리는 박병호의 전성기 시절 보았던 그 ‘거인의 기운’을 느꼈다.
전설은 떠났지만, 영웅의 이야기는 이제 막 159km의 속도로 다시 시작됐다. 2026년 봄, 고척돔은 그렇게 가장 완벽한 세대교체의 순간을 목격했다. white21@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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