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과학과 AI의 아버지 ‘앨런 튜링’ 실화

그날의 침묵과 고독을 깬 질문의 ‘답’

3월 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공연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400만 명의 생명을 구한 암호 해독가이자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은 1950년 논문에서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인류의 윤택한 환경을 만들어낸 기술의 발전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한낱 고철 덩어리일 뿐. 튜링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던 당시 사람들은 그의 이름 앞에 ‘괴짜’를 붙였다.

시간이 흘러 튜링의 물음은 현대 컴퓨터 과학과 인공지능(AI)의 시초가 됐다. 하지만 ‘그의 언어는 코드였고, 우리의 대답은 침묵이었다’라는 아리송한 암호를 남겼다. 그의 삶은 여전히 해독 불가로 뜬다.

연극 ‘튜링 머신’의 튜링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의 세계관 속을 오가며 베일에 감춰졌던 침묵과 고독을 깬다. 무대 위에서 ‘튜링’을 연기하는 배우 이상윤의 목소리로, 그가 세상에 남긴 질문을 마주한다.

이상윤은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기계는 표면에 나와 있는 것”이라며 “기계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크리스토퍼와 진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계 개발에 대한 탐구욕이 있지만, 연극에서는 기계가 발전했을 때 크리스토퍼라고 이름 지어준 것처럼 정말 만나고 싶은 마음이 투영됐다고 생각한다”라고 강조했다.

◇ 몰입형 공간서 느껴지는 압도적 시선…뒤섞인 감정의 소용돌이

‘튜링 머신’은 원형 튜링머신을 중심으로 4면 객석 무대로 구현해 긴장 속 짜릿함을 더한다. 시야와 거리감의 경계를 부순 블랙박스형 공간으로, 육성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과 튜링의 이야기 속 독립적 주체가 된 듯한 관객들의 세계를 혼연일체 시켜준다.

무대 곳곳에는 튜링의 과거와 연결된 소품들이 있다. 각각에 상징을 부여해도 나쁜 해석은 아니지만, 이상윤은 극적 요소로 무게를 실진 않았다. 다만 사과와 체스 말은 달랐다. 이상윤은 사과에 대해 “실제 튜링이 안타까운 선택을 보여주는 소품”이라고 강조했다. 사과를 한입 베어먹는 장면은 튜링 인생의 시작과 끝을 시사한다. 체스 말은 그의 성격을 표현했다. 이상윤은 “튜링은 정확하고 완벽해야 한다. 숫자와 관련해 틀리면 반드시 수정해야 한다”라며 “결국 튜링이 ‘미치광이’로 보이는 연결 장치”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의상으로 그의 심리를 꿰뚫었다. 그는 “튜링이 속옷 차림일 때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를 비참함으로 몰아가는 장면”이라며 육신과 정신을 이용당한 그의 어두운 낯빛을 말했다.

튜링을 받아들인 지점에 대해서는 “튜링이 전쟁 장기화의 직접적 가해자는 아니지만, 전사자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유럽에서는 2차대전이 트라우마다. 건드리는 순간 모든 감정이 뒤섞인다”라며 “독일군의 암호체계인 ‘에니그마’를 해독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차분히 전쟁에서 이기게 하기 위해 시간을 끈 죄책감의 크기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 기계 아닌 인간만 가능한 ‘소통’…어쩌면 인간이 기계일지도

튜링은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과학책에서 ‘모든 어린이가 알아야 할 자연의 경이로움’의 서문 “나와 이 세계의 공통점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이 다른가?”를 반복 언급한다. 마치 자신을 향한 따가운 시선과 감시에 대한 저항의 외침처럼 들린다.

비밀을 감춘 동성애자에 사회성 부족한 말더듬이 괴짜인 튜링을 이상윤은 “로스 형사의 말에 대한 대응이 독특하고, 다른 사람들과 달랐을 뿐이지 이상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그가 굉장히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어울리는 방법이 달랐던 것이지, 소통 방법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대변했다.

재판 중 머레이의 거짓 증언을 듣고 체념한 듯한 그의 모습에 대해서는 “‘반박’은 자신에 대한 ‘부정’이었기에 반론하기 싫었던 것이다. 남보다 내가 모두의 앞에서 인정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 연결선에 머레이가 있었다”라며 “모든 프로그래밍을 한 게 ‘나’라는 것을 깨닫고, 결과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최후의 선택을 이해했다.

◇ 천재·괴짜 말고, 관심이 고팠던 ‘한 사람’의 이야기

한 천재의 인생은 시대와 사람에게 평생 이용만 당한 불행한 외로움이었다. 작품 속 튜링은 화자였다가도 과거의 그때로 돌아가 각 인물과의 갈등을 재현하며 묻고 또 묻는다.

이상윤은 “많은 이야기를 담기보다 튜링이라는 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라며 “동성애자, 기계 생각, 친구에 대한 마음이 모두 합쳐진, 자신이 찾고자 했던 것과 닿지 못한 현실의 차이 때문에 외롭고 고독한 인물을 다양한 형태로 표현하려고 한다”라고 캐릭터 완성의 핵심을 꼬집었다.

하지만 무대 위 튜링은 이성과 본능에 충실한 인물로 숨 쉰다. 이상윤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고 싶었지만, ‘다르다’라는 편견 때문에 발생하는 감정 소모로 인해 괴롭고 외로웠다. 역사적으로 너무 앞서면 이상하게 취급받던 시대의 리스크”라면서 “튜링은 솔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다. 제약 없는 조건을 내민 미국 연구원의 제안을 거절하고, 편견을 견디면서 고국에 남았다. 자신에 대해서는 큰 철학과 확신, 용기가 있는 사람임이 분명하다”라고 강조했다.

시간이 흘러 튜링의 흔적을 기억할 컴퓨터 세상이 됐고, 기술은 더욱 발전해 AI가 일상이 됐다. 명확한 정답을 찾으려던 한 천재는 이 개념에서 가장 인간다움을 발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기계처럼 차갑고 딱딱한 형식적 대면에서 사람 냄새를 찾는 ‘튜링머신’은 3월 1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된다. gioi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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