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견고했던 국산차의 ‘안방 불패’ 신화가 무너졌다. 테슬라를 필두로 한 수입 전기차가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국내 시장을 매섭게 파고들면서, 사상 처음으로 수입차 단일 모델이 국산 볼륨 모델들을 꺾고 월간 판매 1위에 오르는 초유의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 쏘렌토·그랜저 제친 ‘모델Y’…수입 전기차의 맹폭

지난 5월 국내 자동차 시장의 최대 이변은 테슬라 중형 SUV ‘모델Y’의 1위 등극이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모델Y는 5월 한 달간 8762대가 팔리며, 오랫동안 베스트셀링카 자리를 지켜온 기아 쏘렌토(7836대)와 현대차 그랜저(5183대)를 가볍게 제쳤다. 수입차 단일 차종이 국산 메이커를 넘어 통합 1위를 차지한 것은 국내 자동차 산업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수입차 전반의 지형도도 전기차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5월 수입 승용차 신규 등록 대수(2만 9860대) 중 전기차는 1만 4520대로, 점유율 48.6%를 기록했다. 수입차 2대 중 1대가 전기차인 셈이다. 브랜드별로도 테슬라가 1만 866대를 판매해 벤츠와 BMW의 합산 판매량을 넘어섰으며, 물량 조절에 들어갔던 BYD 역시 1032대를 팔아치우며 수입차 순위 7위를 사수해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 ‘가성비’와 ‘고유가’가 만든 퍼펙트 스톰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고물가·고금리 장기화라는 거시 경제적 요인과 수입 전기차의 ‘가격 후려치기’ 전략이 맞물린 결과라고 분석한다.
이러한 가격 인하를 가능하게 한 1등 공신은 제조 원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중국산 LFP 배터리의 탑재다. 과거 국내 시장에서는 주행거리가 길고 출력이 높은 NCM(니켈·코발트·망간) 배터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했지만, 배터리 기술의 발전으로 LFP 배터리 역시 일상 주행에 무리가 없는 수준의 성능을 확보하게 되었다. 여기에 LFP 배터리 특유의 화재 안전성과 무엇보다 압도적인 ‘가성비’가 부각되면서 소비자의 인식은 급격히 전환되었다.
거시 경제적 환경 역시 테슬라의 질주에 힘을 실어주었다.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 장기화로 주유소 기름값이 연일 치솟자, 한동안 ‘충전 인프라 부족’과 ‘비싼 찻값’ 등을 이유로 구매를 망설이던 소비자들이 다시 전기차의 경제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고유가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얼어붙어 가던 전기차 수요의 불씨가 다시 살아났고, 때마침 4000만 원대라는 매력적인 가격표를 달고 나온 모델Y가 그 수요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셈이다.
◇ 붕괴된 내수 10만 대 방어선…韓 완성차의 딜레마

반면, 국산 5개 완성차 업체의 5월 내수 판매량은 총 9만 7110대에 그치며 전년 동월 대비 14.3% 급감했다. 현대차(-23.1%), 르노코리아(-31.2%), 한국GM(-42.6%) 등 일제히 뼈아픈 타격을 입으며 심리적 지지선이었던 ‘월간 내수 10만 대’ 선마저 붕괴됐다.
특히 전기차 부문에서의 위기감은 더욱 크다. 5월 기준 기아의 최다 판매 전기차인 EV3는 3021대, 현대차 아이오닉 5는 2575대에 머물렀다. 현대차 전기차 10개 차종의 판매량을 모두 합쳐도(8157대) 테슬라 모델Y 한 차종의 판매량(8762대)을 넘지 못하는 굴욕을 맛봤다.
국내 완성차 업계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현대차그룹은 초기 구매 부담을 낮추기 위해 차량 가격의 약 40%를 차지하는 배터리를 ‘구독형’으로 전환해 차체만 판매하는 방식 등을 서둘러 추진하며 맞불을 놓을 계획이다.
◇ 위기 속 현대차그룹의 반격…“미래 모빌리티 패권, 결국 ‘실행력’에 달렸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현대차그룹은 단순한 가격 방어를 넘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유기적 결합을 통한 근본적인 체질 개선으로 반격에 나선다.
현대차·기아 AVP본부장 박민우 사장은 최근 그룹 인터뷰를 통해 “미래 모빌리티 경쟁은 누가 기술을 먼저 개발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빠르고 안정적으로 시장에 확장(Scale-up)했는가에 의한 ‘실행력(Execution)’에 달렸다”며 위기 돌파를 위한 그룹의 비전을 제시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박 사장이 테슬라 오토파일럿 개발 초기 핵심 멤버로 활동하며 테슬라 비전(Tesla Vision) 설계를 주도한 글로벌 자율주행 전문가라는 점이다. 테슬라의 성공 방식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미래 모빌리티 경쟁에서 데이터 활용 역량과 SDV(소프트웨어 정의 차량) 중심의 패러다임 전환을 강조했다.
박 사장은 “선행 연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실제 고객이 신뢰할 수 있는 수준까지 기술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현대차그룹은 글로벌 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검증 역량을 빠르게 확보하는 동시에, 자체 자율주행 기술을 고도화하는 ‘투 트랙(Two-track)’ 전략을 가동 중이다. 글로벌 파트너십으로 축적한 방대한 주행 데이터를 활용해 현대차그룹만의 독자적인 엔드투엔드(E2E) 자율주행 모델을 완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수입 전기차의 공세는 단순한 일회성 해프닝이 아니라, 모빌리티 패러다임 전환기 속 가격 경쟁력과 소프트웨어 기술력의 파괴력을 동시에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다. 국산차 업계가 내수 방어를 넘어 글로벌 전동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존의 옵션 중심 고급화 전략을 넘어선 혁신적인 원가 절감은 물론, ‘실행력’을 바탕으로 한 압도적인 AI 및 자율주행 기술력 확보가 시급한 시점이다. socool@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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