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드라마의 공식 중 하나가 주인공의 선함이다. 최소한의 도덕성으로 이야기의 정당성을 갖춰야 한다. 대중은 주인공의 정의로운 성장과 선한 의도로 고뇌할 때 서사에 기꺼이 몰입한다. 오랜 이야기 작법의 불문율이다.
하지만 tvN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이하 ‘건물주’) 속 하정우가 연기한 기수종은 서사의 법칙과 충돌한다. 거액의 시세차익을 노리는 1차원적이고 세속적인 욕망만 좇는, 어디 하나 정 붙일 곳 없는 불편한 존재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데다 아내를 팔아넘기려 하고, 누구보다 각별했던 처남이 죽어가고 있을 때 현장에서 도망치기까지 했다. 가족을 위한다고 외치지만 철저히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말뿐이다. 그렇다고 능력이 출중하지도 않다. 임기응변만 급급하다.

‘건물주’는 이렇듯 정의롭지도 인간적이지도 않은 인물을 전면에 내세웠다. 자칫 시청자의 공감대를 잃고 철저한 외면을 부를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시도다. 이 아슬아슬한 이야기가 끝까지 표류하지 않은 건, 인간의 밑바닥에 깔린 이기심마저 지극히 현실적인 피로감으로 뒤바꾼 하정우의 노련함 덕분이다.
하정우는 어깨에 힘을 완전히 뺀 채 담백하게 감정을 덜어내는 데 집중하며, 지극히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기수종을 빚어냈다. 현실에서 발생하기 힘든 충격적인 우연과 극단적인 선택이 반복되는 사이에도 하정우는 악의보단 평범한 흙수저 가장의 연민을 끌어올렸다. 답답하고 짜증 나지만, 어딘가 꼭 존재할 것 같은 인간의 지질함이 기수종의 얼굴에 오롯이 담겨 있다.
기수종이 땅에 발을 딱 붙이자, 악하거나 혹은 지극히 물질만능주의적인 모든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수백억의 이권을 향해 달려드는 군상의 광기가 선명히 드러났다. 가짜 납치극을 꾸민 민활성(김준한 분)과 바람을 피우고도 뻔뻔하게 나오는 김선(임수정 분), 돈밖에 모르는 전양자(김금순 분), 남의 돈을 쉽게 뜯어내려 한 오동기(현봉식 분), 도파민에 미친 사이코패스 요나(심은경 분), 가장 큰 희생자이면서 같은 방식으로 복수하려 드는 전이경(정수정 분)까지, 모든 인물이 뚜렷한 색을 냈다. 이외에도 류아벨, 박성일, 이신기, 현봉식, 이반석 등 비교적 분량이 적은 캐릭터마저도 인상이 짙다.

‘건물주’는 모든 장애물을 처단하고 누보시티의 책임자가 된 기수종으로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기러기 아빠가 됐고, 생일에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고립된 존재로 남았다. 막대한 부를 가졌음에도 부럽지 않은 건 기수종의 쓸쓸함이 짙게 묻어났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기수종의 피곤한 일상이 다시 지옥이 될 수 있는 문을 열어놓은 채 씁쓸하게 마무리됐다.
대중이 기대하는 통쾌한 사이다나 따뜻한 위로 대신, 이처럼 서늘한 현실을 내밀어 진입장벽을 높인 탓일까. 이 드라마는 시청률 면에서 성공하진 못했다. 임필성 감독과 국내 최고의 배우들이 총출동한 작품치고 시청률 2~3%대라는 아쉬운 성적을 남겼다. 주인공은 물론 누구에게도 이입하기 힘든 캐릭터 설정과 블랙코미디을 중심으로 스릴러, 휴머니즘이 섞인 복합장르 등 실험성이 매우 짙었던 결과다.

그럼에도 우당탕탕 소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현실성을 극대화한 임필성 감독의 연출력, 떡밥을 성실하게 회수한 이야기의 힘, 더할 나위 없는 앙상블을 펼친 배우들의 열연은 숫자보다 더 큰 의미를 남겼다. 새로운 방식의 이야기에 신나게 부딪힌 그 뜨거운 열정이 작품 곳곳에 빛났다. 그 중심엔 매력 없는 캐릭터마저 끝내 설득해 낸 하정우의 저력이 묵직하게 버티고 있었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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