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고용 불안은 모든 갈등의 씨앗이다. 국내 남녀갈등, 미국 내 이민자들을 향한 혐오, 영국 브렉시트 사태 등 전 세계 갈등의 밑바닥엔 고용 불안이 있다. 기술의 발전 앞에서 노동력이 점점 불필요해지는 시대에 노동으로 돈을 버는 건 생사가 달린 글로벌 화두다.
결코 가볍지 않은 사안이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가 더 기대됐다. 명예에 비해 흥행과 거리가 멀었던 감독으로서 성공과 실패를 오가며 고용 불안의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체험한 그가 고용을 소재로 끌어왔다는 점에서 영화 ‘기생충’에 버금가는 사회학적 접근이 있을 것이라 여겨졌다.
착각이었다. 박 감독은 시대의 요구와 동떨어져 있었다. 자기만의 세계에 옴짝달싹 못한 채 갇혀 있다는 것만 확인됐다. 거장의 무게도 없다. 서사의 개연성으로도, 함축과 상징으로 일군 메시지로도 시대상과 거리가 멀다.
주인공 만수(이병헌 분)는 중산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호화스러운 집을 갖고 있고, 자폐 성향이 있는 딸은 첼로를 배우고 있다. 아내 미리(손예진 분)는 테니스를 치고 춤을 배우는 등 여유로운 취미에 집중한다. 가진 것이 많다. 일반적인 대중에게는 경기도 인근 마당 딸린 2층 집을 가진 가장의 실직은 ‘처절한 위기’까지 가지 못한다. 집만 팔면 해결될 일이다.

그런데 사람을 죽인다. 매우 다이렉트로 달려간다. 재취업을 위해 3명의 경쟁자를 제거하는 과정이 ‘어쩔수가없다’의 줄기다. 그런데 죽여야 할 이유가 지극히 개인적이다. 호화스러운 삶을 영위하기 위함이다. 작은 집으로 이사가면 해결될 일을 살인으로 막으려 한 셈이다. 윤리적으로 지나치게 문제가 있는 행위를 코미디로 대충 뭉개 넘긴다. 메타포도 딱히 없다. 영화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반드시 벌을 받는 인과응보도 희미하다. 윤리적으로 파탄난 작품이다.
블랙코미디를 내세웠지만, 허탈한 웃음만 가득한 슬랩스틱 코미디로 전락했다. 사회의 부조리는 거세됐다. “가족을 처절하게 지키려 했던 한 남성의 헛수고를 그리려고 했다”는 발언에서 박 감독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아마도 자신의 처지를 담으려 했던 것 같다. 영화밖에 모르는 자신에게 주어질 수 있는 암울한 미래와 그에 따르는 불안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무려 170억 원의 제작비로 최정상 배우들을 활용해 그려내려 했다기에는 지나치게 사익적이다. 부유하고 풍족한 사람이 상상한 가난에 그친다. 가난마저 도둑맞은 느낌이다. 거장의 책임감도, 세상을 향한 식견도 부족하다.
전반적으로 카메라와 인물 간 거리도 멀다. 가까울수록 감정, 멀수록 관찰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란 측면에서 카메라는 인물의 감정을 담는데 주력했어야 했다. 그마저도 틀린 셈이다. 박 감독은 자신의 불안이 대중과 맞닿았다고 헷갈린 듯 보인다. 덕분에 대중적 공감의 결여가 심각하다는 것만 확인됐다.

BBC는 “올해의 ‘기생충’”이라고 극찬했다. 봉준호 감독에게 결례다. ‘기생충’은 인류애의 시선으로 자본주의가 가진 맹점을 집요하게 파고든 예술가의 고뇌가 엿보인다. 덕분에 부자와 빈곤한 자가 왜 나뉘는지, 빈곤은 무능력한지, 부자는 과연 악한지, 가난은 선을 가졌는지, 개인의 문제인지 구조의 문제인지, 인류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지, 깊이 고민해볼 질문이 가득하다. 이 질문을 한데 모아 영화적 화법을 통해 해학적으로 풀어냈다. 깊이와 기술 모두 정점이다.
‘어쩔수가없다’에는 철학이 없다. 공익도 없다. 영화학도가 새겨볼 만한 연출적 묘가 있을지언정, 관객에게 도움될 만한 의미는 없다. 흥행에 집착한 이기심만 그득히 보인다. 자극적인 이야기에 과감한 시도만 남았다. 영화에 사회학적 관점이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고용을 끌고 왔다면 그에 상응하는 고뇌는 엿보여야 하지 않았을까.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이 빈 자리를 너무 많이 메웠다. 그래서 재미는 있는 편이다. 그래서 속았다는 생각에 반감이 더 크다. 거장을 잃은 상실감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온다. 어쩔 도리가 없다. intellybeast@sportssoe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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