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람틴(홍콩)=황혜정기자] 점수는 4점 차. 2사 2,3루. 풀카운트.

선발 박민성에 이어 구원 등판한 투수 이지숙이 7회초 2사 2,3루 위기를 맞았다. 안타 하나만 내줘도 점수 차가 순식간에 줄어드는 상황.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하나 남겨뒀지만 풀카운트였다. 실투 하나면 안타나 볼넷이 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이지숙이 힘차게 공을 던졌다.

이지숙의 손에서 빠져나간 하이패스트볼에 필리핀 타자가 배트를 힘차게 휘둘렀다. 결과는 헛스윙 삼진. 경기 종료. 그 순간 이지숙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주저앉았다. 그라운드와 더그아웃에 있던 선수단 전원이 그라운드로 달려나와 환호성을 질렀다.

대한민국 여자야구 국가대표팀이 세계무대 진출에 성공했다. 대표팀은 28일(한국시간) 홍콩 람틴에 위치한 사이소완 야구장에서 열린 필리핀과 2023년도 아시안컵(BFA) 조별리그 3차전을 9-5로 승리하고 세계대회 진출권을 따냈다.

쉽지 않은 승부가 예상됐다. 세계랭킹은 4계단 낮지만, 필리핀은 소프트볼 선수 출신으로 선수를 구성해 대회에 나섰다. 소프트볼을 오래한 구력과 함께 타고난 탄력과 힘을 갖고 있어 대표팀이 밀릴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그럴수록 대표팀 선수단은 이를 악물었다. 전날 대표팀 양상문 감독이 선수단 미팅을 갖고 결의를 다졌고, 선수들은 경기에서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한 베이스를 더 가려고 뛰고 또 뛰었다. 대표팀은 ‘뛰는 야구’인 적극적인 도루와 번트로 필리핀을 흔들었다.

이번 필리핀전은 세계대회 출전권이 걸려있는 중요한 경기이자 설욕전이기도 했다. 대표팀은 지난 2019년 아시안컵에서 필리핀과 같은 조에 속해 조별리그 경기를 치렀지만, 역전패를 당하며 조 3위로 세계대회 진출권을 아쉽게 놓쳤다.

당시 대표팀에서 뛰었던 포수 이빛나는 “그 당시 필리핀전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쉽다. 이번에는 정말 꼭 이기고 싶다”고 했었다. 6회 교체 출전해 이지숙과 배터리 호흡을 맞추고 마지막 아웃카운트 공을 받은 이빛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가 받아낸 공이 대표팀을 세계 대회로 이끌었다.

이지숙, 이빛나를 비롯해 주장 최민희도 펑펑 울었다. 정말 중요한 경기이기에 부담감이 정말 심했다. 경기 후 최민희는 “선수들이 독기를 품었다. 쉽지 않은 상대였지만 꼭 이겨야했다. 투혼을 발휘해 모두가 120%까지 쥐어짜며 뛰었다”고 밝혔다.

여자야구 대표팀은 관심도,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묵묵히 국제대회를 준비해왔다. 프로야구 감독·단장을 역임했던 양상문 감독과 프로야구 스타 선수였던 정근우, 이동현, 허일상, 정용운이 코칭스태프로 나서 여자 대표팀을 지원했지만 그때 뿐이었다. 여전한 무관심 속에서 대표팀은 대회 직전까지 메인 스폰서를 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선수단은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는 받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경기에 임했다. 직장인, 학생으로 구성된 선수단은 평일에 생업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따로 연습에 매진했고, 주말마다 대표팀 훈련을 받았다. 이번 대회도 직장인은 연차를 쓰고, 학생은 휴학계를 내고 나섰다.

대표팀은 홍콩에 와서 ‘세계최강’ 일본과 조별리그 1차전에선 0-10 콜드게임 패했다. 그러나 최강 팀을 상대로 실책은 한 개도 내주지 않았다. 희망을 봤다.

조별리그 2차전인 인도네시아와 경기에선 21-3으로 콜드게임 승리했다. 이날 ‘선발 전원’ 안타로 타격 특훈을 받았던 성과가 나타났다.

마지막 조별리그 경기인 필리핀전에선 투혼을 불살랐다. ‘뛰는 야구’로 적극적으로 도루하고 번트 작전을 수행했다. 또 홈으로 뛰어 오는 순간 슬라이딩해 몸을 아끼지 않았고, 상대 투수의 제구 난조로 몸에 볼을 맞아도 절뚝이며 1루 베이스까지 뛰어갔다.

수비에선 마음이 급해 실책이 5개가 나왔지만, 서로 다독이고 격려하며 끝까지 리드를 지켜냈다. 관중석에도 대한민국 응원단이 구장을 찾아 쉴새없이 응원가를 목청 높여 불렀다.

결국,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1차 목표였던 ‘세계대회 진출권 획득’에 성공했다. 이제 대표팀의 2차 목표는 역대 아시안컵 사상 최고 성적을 기록하는 것이다.

여자야구 대표팀은 지난 2017년 아시안컵에서 동메달(3위)을 목에 걸었다. 대표팀이 이번 아시안컵에서 2위 이상의 성적을 내면 역대 최고 성적을 경신한다. 주장 최민희는 “국가대표 선수라면 누구나 목표는 우승”이라며 “어떤 팀을 만나든 더 높은 곳을 올라가기 위해 또다시 투혼을 발휘할 것”이라고 굳은 각오를 다졌다. et16@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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