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註 : 50년 전인 1973년 4월, ‘선데이서울’의 지면을 장식한 연예계 화제와 이런저런 세상 풍속도를 돌아본다.

[스포츠서울] 라디오 방송 DJ(디스크자키) 6명이 모여서 일을 꾸몄다는 화제의 ‘빈대떡 선언’ 이야기가 ‘선데이서울’ 236호(1973년 4월 22일)에 실려있어 눈길을 끈다. 그 내용이다.

1973년 4월 12일, 라디오 음악 DJ로 내로라하던 고영수(당시 23·기독교방송 ‘세븐틴’), 박인희(29·동아방송 ‘3시의 다이얼’) 서유석(28·동양방송 ‘밤을 잊은 그대에게’), 양희은(21·동아방송 ‘팝송 다이얼’), 이장희(26·동아방송 ‘0시의 다이얼’), 임문일(23·기독교방송 ‘꿈과 음악 사이’) 등 파릇파릇한 20대 DJ들이 모여 친목 모임 ‘빈대떡 클럽’을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동양방송은 과거 TBC라디오, 동아방송은 과거 DBS라디오를 지칭한다. 지금은 사라진 두 방송국은 1980년 전두환 정권에서 벌어진 언론통폐합으로 KBS에 통합됐다. TBC라디오는 KBS 제2라디오, DBS라디오는 KBS의 라디오 서울이 되었다.

그런데 세련되고 그럴듯한 이름도 많았을 것인데 왜 하필이면 ‘빈대떡’이라고 했을까. 혹시 이들이 광장시장 빈대떡집에 자주 모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6명이 모두 빈대떡을 좋아해서?

요즘은 음악을 CD나 MP3파일, USB 등 다양한 경로로 듣지만 1970년대는 디스크, 즉 LP 음반이 대세였다. 음악프로그램 방송도 음악 감상도 모두 LP 음반이었다. LP음반 모양이 빈대떡처럼 둥글납작했기 때문에 속칭 그렇게 불렀다. 늘 LP 음반과 붙어사는 DJ들이니 그 말이 친근감도 있고 상징도 될만하다.

1970년대 초는 TV가 전국적인 방송망을 갖추지 못했던 시기라 라디오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했다. 특히 라디오 DJ 프로그램은 청소년과 대학생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들에게 프로그램 진행자인 DJ는 막강한 우상이었다.

누가 더 청취율이 높은가를 놓고 경쟁도 치열했다. 그런 DJ들이 의기투합해 모임을 만들었던 것. 이 클럽의 회원 자격은 단순했다. DJ일 것, 포크송 가수일 것, 20대일 것, 미혼일 것 딱 4가지.

첫 조건인 DJ일 것은 6명 모두가 현직 라디오 DJ로 활약 중이니 확실했다. 두 번째 조건에서 개그맨 고영수가 포크송 가수라니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그러나 개그맨으로 유명한 고영수는 알고보면 1973년에 ‘사철나라’, ‘감기’ 등 자신의 곡을 취입한 포크송 가수이기도 했다.

또 미혼이라야 했는데, 박인희는 1971년에 결혼했다. ‘미혼’이어야 한다는 조건에는 맞지 않았지만, 명예 회원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이들이 빈대떡 클럽을 결성하게 된 것은 당시 포크송 가수들이 다른 장르 가수와 차별을 받고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현실 때문이었다고 했다. 빈대떡 클럽은 먼저 트로트 가수와 출연료 차이를 줄이고, 상대적으로 출연 기회가 적은 포크 송 가수의 방송 출연을 확대해 적어도 트로트와 5대5 정도로 맞추어 보자는 것 등을 결의했다.

하나같이 쉽지 않은 일이고 달걀로 바위를 치는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었지만 빈대떡 클럽이 용감하게(?) 나섰던 것. 이들은 또 각종 정보를 교환하고 PD와 의사소통을 했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가 하면, DJ와 전직 포크 송 가수들이 꾸미는 미니 리사이틀 기회를 마련해 후배를 발굴하는 등 크고 작은 청사진을 내놓았다.

하고자 하는 일은 태산이었다. 그 후 이들이 어떤 활동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 덕분인지, 아니면 가요 트렌드의 변화였는지 오래지 않아 그들이 소망하고 목적했던 포크송의 시대가 열렸다. 크든 작든 이들의 노력이 그런 흐름을 만드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사실, 50년 전 이야기를 소환하기 전까지는 어쩌면 멤버 6명에게조차도 기억에서 사라진 모임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빈대떡 클럽 이름의 유래가 되었던 LP디스크도 사라지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마니아를 중심으로 그 명맥이 이어오던 LP 디스크가 최근 미국에서 35년 만에 CD 판매량을 누르는 제2의 부흥기를 맞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2022년 미국에서 CD는 3300만 장, LP는 4100만 장이 팔렸다니 LP, 즉 빈대떡의 도래를 알리는 듯하다.

그때로부터 50년 세월이 흘러 당시 빈대떡 회원들은 라디오 DJ, 가요, 코미디계에서 대선배가 되고 원로가 되었다. 여전히 포크송을 부르고 귀에 익은 목소리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빈대떡 클럽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스토리는 우리나라 대중문화에서 중요한 자산이고 몇 권의 소설책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이장희의 삶은 특별했다. 1971년 ‘겨울 이야기’로 데뷔한 후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잔의 추억’, ‘그건 너’ 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던 그는 어느 날 활동을 중단하고 이민을 떠났다.

이장희는 미국 LA에서 한인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코리아’를 설립해 운영했다. 여행을 좋아했던 그는 친구의 권유로 울릉도를 찾았고 단박에 이 섬 매력에 푹 빠졌다. 은퇴 후 머물 곳으로 생각하고 있던 후보지가 하와이에서 울릉도로 급선회한다.

1997년부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울릉도에서도 가장 한적한 북면 평리마을에 집을 사고 땅을 일구기 시작해 ‘울릉천국’을 꾸미기 시작했다. 공연도 할 수 있는 ‘울릉천국 아트센터’를 짓고 야외 공원을 만들어 이장희의 음악과 인생사를 고스란히 담았다.

이곳에서는 그와 인연 있는 음악인도 여럿 만날 수 있다. 이장희만의 천국이 아니라 모두의 천국이다. 2011년에는 노래 ‘울릉도는 나의 천국’을 만들었다. 50년 전 빈대떡 클럽 회원이었던 이장희는 이렇게 변해있었다.

이장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가 울릉도를 가진 것은 축복”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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