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고진현전문기자] 세상 일은 결코 논리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인간이 완벽한 이성에 따라 결대로 무늬대로 움직이기보다는 불안전한 감정과 이익에 충실한 욕망에 지배당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세상사라는 사실은 여자 프로배구 김연경이 흥국생명에 FA(자유계약선수)로 잔류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참, 의외다. 무조건 딴 팀으로 이적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었지만 김연경이 예상을 깨고 흥국생명에 남았다는 소식은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스포츠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더욱 드라마틱했다.

흥국생명과 김연경. 숱한 이슈와 화제를 양산했던 둘 사이다. 박 터지도록(?) 싸우고 때론 우승을 위해 힘을 합치면서 그야말로 질기디 질진 애증의 시간을 보냈다. 첫 출발부터 그랬다. 김연경은 2005~2006시즌 신인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흥국생명 유니폼을 입었다. 워낙 대물 신인이라 김연경을 잡기 위한 꼴찌경쟁(?)은 처절했다. 한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추한 흑역사로 기억될 만했다.

전 시즌 순위 역순으로 드래프트 순번을 결정하는 리그 규정에 따라 GS칼텍스와 흥국생명은 시즌 마지막 맞대결에서 서로 지기 위해 낯 부끄러운 짓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흥국생명은 지금은 고인이 된 황현주 감독이, GS칼텍스는 박삼용 감독이 각각 지휘봉을 쥐고 있었는데 얼굴이 더 두꺼웠던 황 감독의 모질고 앙팡진 성깔이 김연경을 낚는 ‘신의 한 수’가 됐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김연경은 흥국생명 유니폼을 입었지만 이후 구단과 김연경의 관계는 견원지간이 연상될 만큼 서로 으르렁댔다.

입단 4시즌 동안이 그나마 좋았다. 내부 사정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3번의 우승컵을 들어올렸으니 김연경과 흥국생명의 질긴 악연의 역사를 놓고 볼 때는 ‘밀월기간’이 아니었나 싶다. 이후에는 정말 잔인했다. 물고 뜯고, 더 나아가 KOVO 리그를 뒤흔드는 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009년 일본 JT 마베라스 진출부터 둘은 숫제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등을 돌렸다. 김연경이야 세계무대를 누비고 싶었겠고, 흥국생명은 급전직하한 팀 성적을 고려할 때 하루라도 빨리 그를 데려와 즉시전력감으로 써먹고 싶었을테니까….

흥국생명의 욕심은 번번이 좌절됐다. 이후 김연경은 여론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방패삼아 터키 중국 무대 등에서 활약하며 흥국생명 애간장을 바짝 태웠다. 무려 11년간의 해외 활동 끝에 2020~2021시즌 친정팀 흥국생명에 복귀한 김연경은 우승 열망에 불을 지폈지만 FA로 영입한 ‘쌍둥이’ 이재영-이다영 선수와 갈등으로 시즌 후 흥국생명을 떠나 중국 상하이팀으로 이적했다.

최강 전력을 뽐냈지만 팀 분열로 준우승에 그친 한을 풀기 위해서였을까. 김연경은 지난시즌 1년만에 흥국생명으로 복귀했지만 또다시 기억하기도 싫은 일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구단 고위층이 감독 고유영역인 작전권을 침해했고,이에 반발한 권순찬 감독의 사퇴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왔다.

여기에 권 감독의 손을 들어준 김연경의 폭로와 후임 감독마저 비난여론을 의식한 듯 취임을 고사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이어지며 프로배구판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여파는 챔피언결정전에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2승으로 우승 트로피를 눈앞에 뒀다가 도로공사에 KOVO 역사상 첫 리버스 스윕(reverse sweep)이라는 수모를 당하면서 흥국생명과 김연경은 함께 꿈을 날렸다.

모든 사람들이 김연경의 이적을 기정사실로 여긴 이유는 지난시즌의 꼬리를 문 악재와 악연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었을 터다. 그랬던 김연경이 애정은 사라지고 증오의 불씨만 남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흥국생명에 FA로 잔류한 사실은 그야말로 예측을 벗어난 충격적 결단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김연경의 이 같은 결정에는 새롭게 지휘봉을 쥔 아본 단자 감독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김연경이 튀르키에 페네르바체에서 활약할 당시 사령탑이었던 아본 단자 감독은 물설고 낯선 김연경의 튀르키에 시절에 신뢰감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본 단자의 흥국생명 감독 부임에도 아무래도 김연경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김연경의 잔류를 통해 충분히 짐작 가능한 대목이다.

결국 김연경의 흥국생명 잔류는 우승에 대한 열망과 아본 단자 감독과의 신뢰가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구단의 충실한 역할과 팬의 신뢰, 이 두 가지 요소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승은 언감생심이기 때문이다. 프로 리그의 우승은 상대 라이벌 조차도 우승을 인정해줄 만한 팀 케미스트리(team chemistry)가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힘의 바탕은 구단과 선수간의 믿음과 신뢰, 그리고 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팬의 간절한 열망과 응원이 필수적이다.

흥국생명이 우승하기 위해선 이러한 요소가 모두 충족되어야 할 게다. 공감능력을 상실한 구단의 시대착오적 기행, 그리고 이를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 퇴행적인 사고를 고치지 못한다면 김연경의 잔류도 별무신통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런 게 바뀌지 않는 한 김연경과 흥국생명의 기구한 악연의 고리는 쉽게 끊어지지 않을 게다. 애증 관계의 피날레는 사랑으로 끝나야 하는데 걱정이 쉬 가시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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