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註 : 50년 전인 1973년 4월, ‘선데이서울’의 지면을 장식한 연예계 화제와 이런저런 세상 풍속도를 돌아본다.

[스포츠서울] 단정하고 기품있는 미모에 고고한 카리스마가 넘치던 여인. 천생 배우 김영애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6년이 됐다.

췌장암으로 투병했던 김영애는 천지에 벚꽃이 흩날리던 2017년4월9일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말기암의 고통 속에도 대본을 놓지않았던 그녀는 유작이 된 KBS2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이 종영한지 고작 40여일만에 고요히 세상과 이별했다.

46년의 연기인생 동안 김영애는 ‘권력의 화신’인 대왕대비(해를 품은 달)로, ‘철의 여인’으로 통하는 재벌회장(로열패밀리 )으로, 때로는 억척스런 모습 속에 엉뚱발랄함을 숨긴 여사장(달려라 울엄마)으로 대중과 함께 했다.

그런 그녀에게 4월은 특별한 달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0년전인 1973년, 스물두살 김영애는 그해 4월2일 첫방송을 시작한 MBC대하사극 ‘민비’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돼 배우로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50년 전 ‘선데이서울’ 233호(1973년 4월 1일) 구석진 자리, ‘이런 일 저런 일’ 코너에 신인 탤런트 김영애의 데뷔를 알리는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그릇 깬 꿈 꾸고 大役(대역) 맡은 新人(신인)’

전날 밤 사발 3개를 깨는 꿈을 꿨던 김영애는 대하드라마 ‘민비’에서 주인공 민비 역으로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들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꿈 이야기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원래 꿈풀이에서 부주의로 그릇을 깨뜨리면 흉몽으로 풀지만, 능동적으로 깨뜨리면 길몽으로 본다고 했다. 사발을 3개나 깨뜨린 꿈은 길몽 중의 길몽이었던 셈.

당시 MBC 3기 탤런트로 연기에 발을 들여놓은 김영애는 드라마 ‘수사반장’ 등에서 ‘행인1’, ‘다방 손님2’ 등 단역으로 출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3년 ‘민비’의 주연으로 발탁되면서 단박에 스타덤에 올랐다.

TV드라마 주연 캐스팅 소식에 이어 그 시대 최고 인기였던 주간 잡지 ‘선데이서울’ 234호(1973년 4월 8일) 표지모델 자리까지 꿰찼다. 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탁기 광고모델로도 등장했다.

‘선데이서울’ 234호에 실린 ‘금성백조세탁기’ 광고 ‘지금은 세탁 중… 뜨개질을 하면서도 빨래를 할 수 있습니다’의 모델이 김영애였다.

그야말로 ‘선데이서울’ 지면 여기저기에서 그녀의 얼굴을 만날 수 있었으니 그해 4월은 김영애 인생 최고의 달이라 할만했다.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져 있었다’는 누군가의 말이 1973년 4월 김영애에게 현실이 되어 있었다. 그날로 부터 2017년 4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는 안방극장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연기자의 길을 걷는다.

데뷔 드라마이자 출세작이었던 사극 ‘민비’는 일일극으로 1973년 4월 2일부터 12월 28일까지 장장 217회를 방송했다. TV드라마에서 ‘민비’(명성황후)는 궁중 드라마나 한말 격동기 역사극에서 자주 등장했다.

이때처럼 주인공일 때도 있었고 대원군, 의친왕 등 다른 역사적 주인공과의 관계로 등장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탤런트 김영애는 명성황후(민비)와 인연이 참 많았다.

1973년 데뷔작인 MBC드라마 ‘민비’에서 민비 역, 1980년 MBC 광복절 특집극 3부작 ‘의친왕’에서 명성황후 역, 1982년 KBS대하드라마 ‘풍운’에서 명성황후 역을 맡았다. 그 덕분에 그녀는 명성황후 전문(?) 탤런트라는 명성을 얻었다.

명성황후의 캐릭터와 그녀의 이미지가 잘 맞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기 인생 46년 동안 그녀는 드라마 120여 편, 영화 64편에 출연했다고 한다.

김영애는 “쓰러질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연기자의 길”이라며 췌장암의 고통 속에서도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에 출연해 혼신을 다했다. 유작이 된 이 드라마에는 병세 악화로 마지막 4회분에는 끝내 등장하지 못했다.

그녀는 탤런트에 머물지 않았다. 중년을 넘긴 나이에 황토팩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누적매출액이 1000억원을 넘는 등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이런 성공 가도에 2007년 10월 한 방송사의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에서 김영애 황토팩의 중금속 함유 문제를 제기하면서 사업은 브레이크가 걸리고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건강과 관련된 분야는 소비자가 민감하다. 소송을 제기하고 안간힘을 썼지만 한번 기울기 시작한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민사재판에서 일부 승소하기는 했지만, 사업은 이미 무너진 뒤였다. 이것도 그녀에게는 큰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그녀가 연기자가 된 과정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당시 부산에 있었던 TBC(동양방송) 부산방송에서 일하다 MBC 탤런트 공모에 응시했다는 이야기, 또 하나는 은행원으로 일하던 중 빼어난 미모를 본 주변의 권유로 탤런트 공모에 응시했다는 이야기다.

그녀는 많은 사연을 남기고 사랑받는 연기자로 살다 갔다. 그녀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배우인 게 정말 좋다. 가능하다면 다음 생에 태어나서도 다시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배우들이 자주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떠날 날을 받아 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시점에서 했던 말이라 더욱 가슴이 아린다.

김영애는 4월 부산에서 태어났다(1951년 4월 21일). 4월(1973년)에 첫 주연 탤런트로 데뷔했다. 65세에 세상을 떠나던 때도 4월(2017년 4월 9일), 그녀는 4월의 여인이었다.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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