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무의 오디세이

박용국 단장
박용국 NH농협은행 스포츠단 단장. 자신이 10년 전 창설한 ‘NH농협은행 고양 국제여자챌린저대회’ 토너먼트 디렉터(TD)로 활동할 때 모습. 제공|농협은행

[스포츠서울|김경무전문기자] 20세기의 석학 버트란트 러셀(1872~1970)의 자서전 ‘인생은 뜨겁게’ 서문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열정들이 마치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어느 분야에서든 내면에서 용솟음치는 인간의 열정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을 만들고, 그런 도전정신은 해당 분야에서 특출한 인물을 배출해왔다.

국내 스포츠계에서도 남다른 열정으로 테니스 선수와 지도자(코치, 감독)로서의 삶에 머물지 않고, 방송해설가, 회사의 스포츠마케팅 책임자로 폭넓은 활동을 펼치는 등 외연을 확장해 엘리트스포츠 출신들에게 귀감이 되는 이가 있다.

올해 말 정년퇴임을 앞둔 박용국(56) NH농협은행 스포츠단 단장이다. 지난 17일 저녁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 농협대학교 연수원 대강당에서는 선수단이 참석한 가운데 특별한 그의 은퇴식이 열렸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박용국 단장님의 명예로운 퇴임을 축하드립니다.” 농협은행 스포츠단의 장한섭 부단장과 직원들, 그리고 전통의 명문 여자테니스와 여자정구팀 선수들은 이런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아들의 연주
박용국 단장의 퇴임식에서 엘가의 ‘위풍당당행진곡’을 연주하는 아들(오른쪽). 발달장애인들로 구성된 가온클래식 연주단이다. 제공|NH농협은행

눈물 흘리는 박단장
아들의 연주에 눈물을 흘리는 박용국 단장. 제공|NH농협은행

발달장애를 겪은 아들(박도연)이 단원인 현악 4중주단이 연주하는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강당에 울려퍼지자, 박 단장은 눈물을 훔치기 바빴다. 어머니(이미영)의 헌신적 뒷바라지로 발달장애인 7명으로 구성된 ‘가온클래식’ 합주단원이 된 아들(첼로 연주자)은 퇴임하는 아빠에게 코끝이 찡해지는 선물을 선사했다. ‘아빠의 청춘’ 연주도 곁들여져 “원더풀 아빠”의 인생을 염원했다.

박용국 단장은 건국대와 대우중공업에서 선수생활을 했고, 1997년 NH농협은행 여자테니스단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감독을 맡아서는 팀의 ‘대통령기 14연패’라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이루며 실업테니스 지도자로서 절정의 시기를 보냈다. 그가 지도한 이예라(은퇴)는 국내오픈대회 여자단식 시즌 6관왕 등극에 오르기도 했다.

감독 시절 특히 박 단장은 고양시의 협조를 얻어내 ‘NH농협은행 고양 국제여자챌린저테니스대회’를 창립해 10년 넘게 대회를 개최해왔고, 해외 강호들이 다수 참여하는 대회로 발전시켰다. 이 대회는 국내 유망주들이 세계랭킹 포인트를 올리는 절호의 기회로도 활용됐다.

그는 또한 소속팀 테니스 선수들과 함께 매년 전국 등지를 돌며 불우한 청소년 등을 위한 재능기부 활동에도 적극 나서는 등 모범이 됐고, 매직테니스 행사도 열어 어린이들에게 테니스에 열정을 갖도록 했다.

농어촌 지역 어린이를 위한 매직테니스
농어촌 어린이들을 위한 NH농협은행 스포츠단의 매직테니스 현장. 제공|NH농협은행 제공

샘솟는 열정은 이런 성과에 만족하지 않았다. 박 단장은 지난 2017년 은행장과 간부들을 집요하게 설득해 NH농협은행 스포츠단을 기어코 창단시켰고, 초대 단장이 돼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2018년부터 테니스·정구·배드민턴 등 라켓 종목의 전국 동호인 대회를 개최해 큰 호응을 얻었다. 2019년 6월 서울 광화문 근처에서 개최한 ‘3대3 길거리 농구대회’는 젊은 층들의 참여로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3대3 길거리 농구
NH농협은행이 지난 2019년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개최한 3대3 길거리 농구대회의 시상식. 제공|NH농협은행

NH농협은행 배드민턴 동호인대회
NH농협은행이 지난 2018년 경기도 성남시에서 처음 개최한 배드민턴 전국 동호인대회. 제공|NH농협은행

그러나 박 단장은 지난해초 터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2년 남짓 자신이 계획한 스포츠단 행사를 제대로 열지 못해 안타까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런 와중에 지난해말 조재호·김민아·전애린 등으로 구성된 프로당구팀 ‘그린포스’를 창단해 생소한 당구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팬데믹 시대, 젊은 MZ세대를 타깃으로 한 e스포츠 후원에 나서기도 했다. KBS N 스포츠와 SPOTV에서 ATP·WTA 투어 방송 해설위원으로 오래 전부터 활동해오고 있다

박용국 해설위원
KBS N 스포츠와 SPOTV에서 ATP, WTA 투어 해설도 하고 있는 박용국 단장. 제공|NH농협은행

박 단장은 “선수로서 최고가 되지는 못했지만, 최선을 다했다”며 40년 자신의 테니스 인생을 돌아봤다. 그는 이날 퇴임사에서 “우리 아들 첼로를 켤 때는 눈물이 나오더라”며 “코로나-19에 발목이 잡혀 2년간 아무것도 못했다”며 진한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은혜·백다연·정보영 등 농협은행 여자테니스단 미래를 짊어질 선수들을 향해서는 “미쳐라! 그래야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다. 운동장에서 땀을 흘려야 한다”고 새삼 강조했다. 이날 은퇴식에는 테니스 마니아인 이창훈, 정은표, 윤종신, 신정환 등 연예인들의 영상 축하 메시지도 줄을 이었다. 전미라 코치는 “항상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박용국 단장은 “한국 테니스 발전을 위해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식으로 테니스 주니어 아카데미를 만들어 재능기부로 마지막 불꽃을 태우겠다”는 퇴임 뒤 포부를 밝혔다. kkm100@sportsseoul.com

기사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