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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스위스란 곳은 누구에게나 듣기만 해도 벌써 가슴이 뛰는 최고 여행지임에 틀림없다. 그 매력적인 곳으로부터 약 8800㎞ 정도 떨어진 한국에 사는 우리들에게 하얀 알프스와 초원으로 상징되는 풍경은 절대적 이상향이었다. 아마도 아동잡지의 영향이었을까? 대체 스위스가 어디에 붙었는지도 헷갈리던 어린시절에도, 어느 나라를 가보고 싶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스위스’라고 똑똑히 대답했던 것 같다. 알프스엔 소녀 하이디가 살고 있고, 파라마운트 영화로 익숙한 산봉우리 아래로 술통을 매단 커다란 개가 뛰어다니는 곳. 그래서 난 언젠가 그곳에 가게 되면 초록 융단같은 초원에 누워 별을 보리라 벼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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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스위스 정부는 전세계인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진 수려한 그들의 대자연보다는 자신의 생활과 전통을 보여주기 위한 미디어 행사를 열었다. 실로 자신감 넘치는 행사가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알프스는 우리나라 지리산(7개 시군)처럼, 여러 국가에 걸쳐 있고 최고봉인 몽블랑도 뜻밖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에 있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알프스는 곧 스위스’로 정의되고 있지 않은가. 오랜 시간을 자연과 싸우고 또 화합하고 살아온 스위스인들은 이제 그들의 속살을 보여 주고 싶은 모양이다. 기꺼이 볼 준비가 되어있음은 물론이다.
폭염으로 이글거리던 이 여름, 복잡한 서울을 떠나 알프스 고산마을에 잠시 기거하며 머리통까지 울리는 요들을 듣고, 구린내 나지만 진귀한 치즈를 맛봤다. 가려진 스위스의 속살을 들여다 보는 재미에 모든 것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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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하회마을’로 향하다.
낯설다. 책과 티비를 통해 아름다운 스위스의 풍경을 수도 없이 봤고, 일전에 한 두번 가보기도 했지만 스위스는 여전히 낯선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우선 도착 공항이 있던 쥬릭(Zurich)부터 그렇다. ‘취리히’라고 배웠고 발음상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스위스인들은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 모양이다. 계속 고집을 부리다간 집에 돌아가지 못할 뻔 했다. 취리히는 유로화를 쓸 수 없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여느 유럽 도시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단, 시내 곳곳에 호프(Hof)가 있어 내심 즐거운 도시일 것이라 기대했지만, 호프란 시원한 맥주와 닭튀김을 파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커다란 저택이나 큰 건물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러니 이제 맥줏집을 가자고 호프집에 가자는 말을 해선 안된다.(알아보니 Bierschenke 또는 Bierstube라고 부르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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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취리히 역에서 출발하는 커다란 2층 기차를 타고 북서부의 작은 도시 아펜젤(Appenzell)로 향한다. 스위스 국영 철도회사의 이름은 ‘SBB CFF FFS’으로 마치 와이파이 패스워드 같은 이름이지만, 시계처럼 정확하고 노선 및 플랫폼 안내가 잘 되어 있어 외국인들이 이용하기에도 편리하다. 스위스는 시계로 가장 유명하지만 철도 역시 상당히 발달했다. 높은 산과 호수, 절벽을 가르고 건너며 마을과 마을을 거미줄처럼 엮는다. 기차는 곧 푸른 초원을 가르며 질주한다. 가끔 한국의 농촌에서 맡을 수 있는 ‘흔한 냄새’가 코를 찌르기도 하지만, 목가적인 풍광에 상쇄되어 그마저도 향기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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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갈아타기 위해 고사우(Gossau) 역에 내리자 매우 클래식한 빨간색 기차가 나타났다. 아펜젤러 반(Appenzeller Bahn)이다. 서울랜드의 코끼리 열차처럼 타는 것 만으로도 왠지 기분이 즐거워진다. 게다가 스위스에서 가장 전통적인 색채가 가장 강하게 남은 도시로 향하는 열차라니. 과거로 향하는 드로리안(영화 백투더퓨처의 타임머신)이라도 타는 상상이라도 들았는지 몰라도 심박수처럼 덜컹거리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녹색을 가로 지르는 기분이 몹시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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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속의 진짜 스위스.
한국으로 따지면 하회마을이나 양동마을 쯤되는 아펜첼은 마을 주민이 1년에 한번 모여 공동 결정 사항을 정하는 직접 민주주의 방식 ‘란츠게 마인데(Landsgemeinde)’ 등 전통을 여태껏 지키며 살아가는 만큼 보수적인 색채 역시 강하게 서려있다. 뭐 보수적인 색채라 해서 주민 모두가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다. 다만 1990년(오타가 아니라 불과 23년전이다)에서야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는 정도다. 어쨌든 란츠게 마인데가 열리는 4월이면 마을 주민들이 광장에 모여 손을 들어 투표하는 진풍경을 보기 위해 전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드는데,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가장 최근에 결정된 항목은 ‘산에 마운틴바이크 족들이 몰려 위험하니까(몇몇 지역에서)이를 금지해야 한다’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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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는 의외로 가톨릭 인구가 많은데 특히 아펜젤 일대는 16세기 종교전쟁으로 서로 싸워 주(州)가 반으로 갈라섰을 정도로 독실한 구교 지역이다. 인구 대부분이 낙농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봄에 산으로 소떼를 몰고 올라간 목동들이 젖을 짜서 손수 치즈를 만들고 내려오는 등 전통적인 풍습이 고스란이 살아있다. 그만큼 외국인들에겐 스위스의 생활전통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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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작다. 중앙을 관통하는 시내 주변으로 빵집과 치즈가게 등이 있고 역 주변으로 가면 국회 구실을 하는 광장이 있다. 부근엔 성당과 묘지 등 마을의 공동 시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건물은 취리히에서 본 것과는 역시 다르다. 뽀족한 지붕에 목조 건물은 다소 독일 풍인데, 너와지붕 등 산간지역의 특수성을 간직하고 있다. 주민들이 얼마나 예술성이 뛰어난지 거의 대부분의 건물에 붙은 간판이나 명패는 공예품 수준이다. 지대가 높아 겨울이 일찍 시작되는 탓에 사람들은 집안에서 많은 것을 조물락거리며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중에 유명한 것이 시계 등 수공업이며 공예 역시 스위스 인들의 예술적 감각과 철두철미한 정신이 결합돼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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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 마을에는 호텔과 식당 역시 몇 군데 되지않지만 의외로 알려진 맛집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치즈와 감자를 곁들인 마카로니를 수북히 내놓는 집과 진저브레드(운영체제가 아닌 생강빵)을 잘 굽는 빵집 등이 이미 관광객들에게 알려져 이들 가게에는 바벨탑처럼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손님들로 가득하다.
하얀 십자가가 그려진 빨간색 국기는 온통 초록의 나라와 정말 잘 어울려서 가슴을 설레게 만들지만 조금 헷갈리기도 한다. 스위스인들은 국기를 정말 사랑해서, 어느 마을이나 곳곳에 십자 깃발이 솟아있다. 병원이나 약국인 줄 알고 가보면 카페였고 식당이었고 또 그냥 집이다. 정말 병원이나 앰뷸런스에는 대체 무엇이 그려져있을까 궁금했다.(후에 알아보니 녹색 바탕의 십자 깃발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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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 구름 속에 스위스 전통과 역사가 숨어있었네.
흔히 스위스 3대 치즈를 꼽자면 아펜젤러, 에멘탈러, 그뤼예르로 말하니 나는 분명히 세계적 치즈 명산지에 온 것이다. 톰과 제리에 나오는 구멍 숭숭 뚫린 치즈는 아니지만 진하고 강한 향과 맛을 내는 아펜젤러 치즈는 최고의 건강식으로 꼽힌다. 마을에서는 실제로 매년 봄이면 소를 끌고 산으로 올라가서 여름 내내 치즈를 만들고 내려오는 목동들의 소몰이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는데,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기 때문에 그들이 내려올 때면 방울소리와 요들이 울려퍼지는 등 마을 전체가 떠들썩해진다. 치즈를 만들고 커다란 방울 소리를 내며 소를 몰고 내려오는 풍경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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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알프스 대간(?)’의 앞부분이지만 이곳에도 해발 2000m 이상의 고산들이 즐비하다. 이중에서도 특히 센티스 산(Mt.Santis·2502m) 등 알프슈타인의 봉우리 중 하나인 호헤카스텐(Hoher Kasten)에 케이블카로 오를 수 있다. 한참을 구름 속으로 오르면 정상에는 360도 회전하는 전망 레스토랑이 있는데, 이곳에선 라인강을 따라 늘어선 앙증맞은 마을이 성냥곽보다 작게 보인다. 이날은 사방이 구름 속이라 그저 어지럽게만 느껴졌지만 평소에는 굉장한 경치를 선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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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본격적인 스위스의 역사와 전통, 문화를 탐방하기 위해 택한 곳은 바로 빌트키르클리(Wildkirchli) 동굴이다. 해발 1644m 높이의 에벤알프 산 정상 부근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수직의 절벽에 천연 동굴이 나 있고 이 안에 오두막, 그리고 동굴 교회가 있다. 17세기 사제 파울루스 울만이 속세를 떠나 숨어들어 지은 오두막과 교회가 마치 중국의 고산 사원처럼 절벽에 자릴 잡고 있다. 무척 신기한 풍경이다. 이곳은 스위스를 찾는 하이커들이 손꼽는 하이킹 코스로, 일단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 다음 교회를 둘러보고 애셔 산장(Ascher mountain inn)에서 점심을 먹고 걸어서 내려온다. 스위스에선 한국과는 달리 하이킹을 내려오는 코스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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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대안도 없었지만, 마카로니와 으깬 감자, 치즈로 이뤄진 산장의 점심은 무척 맛있었다. 절벽을 지그재그로 훑으며 내려오는 길은 정말 얄궂게도 비가 뿌리고 구름이 가득해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난코스였지만 안개 덕분에 몽환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무렴, 스위스에서의 하이킹인데 오죽할까. 1시간 반 정도 내려오자 욱신욱신 도가니가 저려왔지만, 갑자기 펼쳐진 오팔색 제알프제(Seealpsee)호수의 풍경에 감동한 나머지 신통한 관절약이라도 한방 맞은 기분이다. 구름을 두른 산과 잔잔한 호수, 그리고 풀을 뜯는 소떼까지. 이건 정말이지 미리 맞춰놓은 연출이고 밥 아저씨의 그림같다. 힘들여 내려온 이들을 위한 인센티브 보너스이자 상(賞)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때까진 몰랐다. 이런 ‘그림’과 ‘상’이 스위스에선 도처에 널렸다는 것을.<다음 주에 계속>
아펜젤(스위스) | 글·사진 이우석기자 demory@sportsseoul.com
스위스 여행정보
●가는 길=대한항공이 인천공항에서 취리히까지 직항노선을 주3회 운항하고 있다. 최근 합리적인 가격과 준수한 서비스로 이용량이 늘고 있는 체코항공을 이용하면 프라하를 경유해 취리히로 갈 수 있다. 취리히 공항은 지난 여름 관광 안내 데스크 ‘스위스인포 플러스(Switzerlandinfo+)’를 새단장했다. 도착지 1번 구역(Arrival 1)에 위치한 인포플러스에서는 여행객들에게 다양한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한다.
●국가정보=영세중립국인 스위스는 유럽연합(EU) 가입국이 아니라 유로를 사용하지 않는다. 공식 화폐는 스위스 프랑(CHF)로 1프랑은 약 1200원. 물가는 다소 높은 편이다. 호텔에선 220V, 3점식 콘센트를 사용하며 국내 전자제품 플러그는 구멍보다 두꺼워 어댑터를 사용해야 한다. 스위스는 독어, 불어, 이태리어, 로망슈어(라틴어계) 등 모두 4개 언어를 사용하지만 취리히와 아펜첼 지역은 독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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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패스=스위스 내에서 이용하는 모든 열차, 버스, 여객선 등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으며 박물관, 케이블카 등에서도 무료나 할인혜택이 주어진다. 인원수에 따라 할인 폭이 커지는 세이버 패스, 1달 이내 일정 대로 날짜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플렉시패스 등 다양한 권종이 있다.www.swisstravelsystem.com. 레일유럽 www.raileurope-korea.com.
●최신 여행정보는 스위스정부 관광청 한국사무소(www.myswitzerland.co.kr)에서 얻을 수 있으며,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에도 잘 나와 있다. 10월달에는 루체른 가을 축제(5~20일)가 열리며 이탈리아권 티치노에서도 루가노 축제(4~6일), 아스코나 가을 군밤축제(5~12일), 벨린조나 산악치즈 축제(11~13일) 등 다양한 테마의 축제가 풍성하다.
이우석기자 demory@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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