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장강훈기자] “샌디 쿠팩스의 전성기를 보지 못해 아쉽다면, 클레이턴 커쇼의 투구를 지켜보는 것이 차선책은 될 것이다.”

2010년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좌완 에이스 커쇼(27·LA 다저스)에 대한 극찬이다. 지난해 6월 19일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2014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콜로라도와 홈 경기에서 삼진 15개를 잡아내며 생애 첫 노히터를 작성했다. 7회초 선두타자 코리 디커슨의 땅볼을 유격수 핸리 라미레스(보스턴)가 실책하지 않았다면, 퍼펙트도 가능했던 위대한 투구였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MLB.com)를 비롯한 현지 언론은 즉각 “쿠팩스의 투구를 보는 듯했다”며 극찬했다. 다저스가 브루클린에서 LA로 연고지를 옮긴 뒤 메이저리그 최강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이끈 샌디 쿠팩스(80)가 현대에 다시 등장했다는 것이다. 1960년대와 2010년대라는, 50년을 관통한 최고 좌완이 같은 시대에, 한 팀에서 함께 뛰었다면 어땠을까. 이번주 ‘시공초월 라이벌’은 ‘푸른 피의 좌완 에이스’ 쿠팩스와 커쇼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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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LA다저스의 살아있는 전설 샌디 쿠펙스(왼쪽) / 스포츠서울 DB

◇‘신의 왼팔’ 만장일치 사이영 상 수상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쿠팩스는 다저스 입단 초기에는 공만 빠른 그저 그런 투수였다. 엄청난 공을 뿌리면서도 제구 불안이 늘 발목을 잡아, 1955년부터 세 시즌 동안 9승 10패 방어율 4.00(204.2이닝 91실점)에 불과했다. 연고지를 브루클린에서 LA로 이전해 콜리세움 스타디움 시대를 맞은 1958년, 40경기(선발 26경기)에서 11승 11패 방어율 4.48로 처음 두자릿 수 승리를 따낸 쿠팩스는 부상과 부진 등으로 출장기회가 줄어들자 1960년, 야구를 그만 둘 결심까지 한다. 구단의 끈질긴 설득 끝에 “딱 한시즌 만 더”를 외쳤던 쿠팩스는 1961년 42경기(선발 35경기)에 나서 18승 13패 방어율 3.52로 ‘신의 왼팔’의 탄생을 알렸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내가 진짜 열심히 훈련한 것은 1960년 겨울이었다. 러닝을 많이 하기 시작했고, 올바른 방향을 찾아 나아가기로 결심했던 해”라고 밝혔다. 이미 리그를 압도하는 구위를 갖고 있었던 쿠팩스는, 하체 밸런스를 활용한 투구 매커닉에 눈을 뜨면서 내셔널리그 단일 시즌 최다 탈삼진 신기록(269개)을 세우기도 했다. 투수 친화적인 다저스타디움으로 홈 구장을 옮긴 1962년부터가 쿠팩스의 진짜 전성기였다. 다저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견인한 1963년, 자신이 등판한 40경기를 모두 선발로 나선 쿠팩스는 311이닝을 던지며 306개의 삼진을 잡아내 25승(5패) 방어율 1.88로 역사상 첫 ‘만장일치 사이영상’과 리그 MVP, 월드시리즈 MVP를 휩쓸었다. 농구장학금을 받고 신시내티 대학에 입단한, 서부 여행이 소원이던 장신 유태인 청년이 메이저리그의 별이 돼 ‘신의 왼팔’이라는 애칭을 받은 순간이었다.

[SS포토]커쇼
LA다저스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 /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신의 두 번째 왼팔’도 만장일치 수상

신의 왼팔이 다저 블루 유니폼을 처음 입은지 51년 뒤, 다저스는 ‘신의 두 번째 왼팔’을 손에 넣었다. 텍사스주를 휩쓸어 버린 고졸 좌완 투수를 1라운드 전체 7순위로 선택한 것이다. 앤드루 밀러(양키스) 루크 호체이버(캔자스시티) 에반 롱고리아(탬파베이) 브래드 링컨(피츠버그) 등 당시 드래프트에서 최대어로 꼽히던 선수들이 1~6순위 지명권을 가진 구단들에 차례로 입단해, 초조하게 차례를 기다리던 다저스에게 커쇼가 들어왔다. 입단 초기 제구 불안으로 고전한 쿠팩스와 달리 커쇼는 1년 반 가량의 마이너리그 생활에서 군계일학의 기량을 과시했다. 2008년 22경기(선발 21경기)에서 5승 5패 방어율 4.26으로 빅리그 수준을 절감하는 듯 했지만, 풀타임 첫 해인 2009년 31경기(선발 30경기)에서 8승 8패 방어율 2.79로 안정적인 투구를 뽐냈다. 풀타임 3년차인 2011년, 커쇼는 자신이 선발등판한 33차례 경기에서 233.1이닝을 소화하며 21승 5패 방어율 2.28로 ‘신의 두 번째 왼팔’의 탄생을 알렸다. 커쇼보다 후순위(10순위)로 지명된 팀 린스컴(샌프란시스코)이 2008, 2009년 연속 사이영상을 수상하자, 일부 지역 언론이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다저스의 드래프트 책임자 로건 화이트를 비난하던 목소리가 싹 사라졌음은 물론이다. 2011년 사이영상 수상자는 1966년 쿠팩스 이후 45년 만에 트리플 크라운(다승, 방어율, 탈삼진 1위)을 달성한 첫 번째 투수인 커쇼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커쇼는 2013년과 2014년 사이영상 2연패에 성공하며 자신의 우상 쿠팩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특히 2014년은 ‘신의 왼팔’이 사상 첫 만장일치 사이영상을 수상한지 51년 만에 다시 한 번 만장일치 사이영상을 따낸 다저스 좌완으로 이름을 올렸다. 내셔널리그 역사상 쿠팩스 이후 두 번째로 리그 MVP와 사이영상을 함께 거머쥔 투수로도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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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다저스 살아있는 전설 샌디 쿠펙스(왼쪽) / 스포츠서울 DB

◇커쇼가 존경한, 쿠팩스가 사랑한 투수

최근 ESPN에서 쿠팩스가 첫 사이영상을 수상한 1963년부터 세 번째 사이영상을 거머쥔 1966년까지 4시즌과 커쇼의 4시즌(2011-2014년) 기록을 비교했다. 쿠팩스는 네 시즌 동안 97승 27패 방어율 1.86을 기록했다. 네 시즌 중 세 시즌(1963, 1965, 1966)을 300이닝, 300탈삼진을 기록했고 세 차례 20승 이상 거머쥐었다. 3년 간 이닝당 평균출루허용율이 0.91, 경기당 삼진이 9.3개였다. 커쇼는 네 시즌 동안 72승 26패 방어율 2.13으로 매우 훌륭한 성적을 남겼다. ‘분업화 시대’를 고려해도 세 차례 200이닝(2011~2013년) 이상, 네 차례 200탈삼진 이상 기록하며 현역 최고 의 존재감을 증명했다. 이 기간 이닝당 평균 출루허용율이 0.95, 경기당 삼진 9.4개로 쿠팩스에 결코 뒤지지 않는 성적을 남겼다. 2013년 방어율 1.83으로 시즌을 마쳐 1966년 쿠팩스(1.77) 이후 커쇼는 47년 만에 1점대 방어율로 시즌을 마친 선수로 기록되기도 했다. 둘을 왜 ‘시대를 관통한 닮은꼴’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정표인 셈이다. 당시 MLB.com은 ‘쿠팩스는 9시즌 째인 27세에 처음 1점대 방어율을 기록했지만, 커쇼는 6시즌째 25세에 해냈다’며 쿠팩스가 기록한 각종 기록을 커쇼가 깰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로 커쇼는 12일 현재 259개의 삼진을 잡아내 쿠팩스 이후 49년 만에 삼진 300개를 잡아낸 다저스 좌완으로 이름을 올릴지도 관심사다. 커쇼는 이미 6연속 시즌 200탈삼진 시즌을 치러내며 쿠팩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시공을 초월한 둘의 라이벌구도에 많은 이들이 흥미를 느끼고 있지만, 커쇼는 ESPN과 인터뷰를 통해 “나는 한 시즌에 300이닝을 소화하거나, 300삼진을 잡아내기 힘들 것이다. 쿠팩스가 세운 기록은 말도 안되는 수준이다. 그 분과 경쟁한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 없다. 내가 쿠팩스와 동급으로 분류되기에는 아직 한참 모자르다. 나는 쿠팩스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며 존경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쿠팩스는 “커쇼는 내가 본 최고의 좌완”이라며 후배를 한껏 치켜 세웠다.

[SS포토]전설의 샌디 쿠펙스
LA 다저스 살아있는 전설 샌디 쿠펙스(왼쪽) / 스포츠서울 DB

◇리그평정 비결? 최고의 커브볼러

쿠팩스가 화려한 불꽃을 피울 때 메이저리그에 입성해 그의 투구를 지켜본 래리 더커 전 휴스턴 감독은 “커쇼의 투구를 보면 한치의 망설임 없이 쿠팩스가 떠오른다”며 둘이 닮은 꼴이라는 것을 증언(?)했다. 더커 감독은 “쿠팩스는 커쇼보다 삼진을 더 많이 잡는 투수였다. 둘의 직구는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브레이킹 볼을 갖고 있다. 쿠팩스는 체인지업을, 커쇼는 슬라이더로 서로 다른 카운트 피치가 있다. 하지만 단언컨데 둘의 커브는 비교할 수 없이 매우 뛰어나다”고 회상했다. 쿠팩스는 커쇼가 리그를 지배하기 전인 2008년 ‘제임스 가이드 투 피처스’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커브볼러로 선정됐다. 160㎞에 육박한 빠른 공에 폭포수 커브를 가미해 가뜩이나 스트라이크존이 넓어 타자들이 고생한 1960년대 메이저리그를 평정한 것이다. CBS스포츠는 지난달 29일(한국시간)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구종별 최고 투수를 꼽았다. 구종별 가치분석(the Pitchf/x pitcj type values)에서 제시한 특정 구종에 따른 런 세이브 지표에서 커쇼의 커브는 15.4점을 기록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좋은 커브로 손꼽혔다. CBS스포츠는 ‘최근 메이저리그에서 커브는 하락세를 보이는 구종이다. 커쇼는 이 중에서도 가장 전통적인 커브라 할 수 있는 12-6(12시에서 6시 방향으로 떨어지는 구종) 커브를 던지는데,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것이 어려운 이 구종으로 볼넷을 내주지 않았다. 결정구로 커브를 던져 절반 이상 스트라이크존 안에 넣을 수 있는 능력도 지녔다’고 극찬했다. ‘신의 왼팔’로 불리는 쿠팩스와 커쇼가 리그를 평정할 수 있었던 것은 소위 ‘3층에서 지하로 떨어진다’고 표현하는 커브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SS포토]커쇼 \'내 피부는 소중하니까\'
LA 다저스 클레이튼 커쇼 / 스포츠서울 DB

◇‘황금 오른팔’과 함께라 외롭지 않다

쿠팩스와 커쇼의 또 하나 공통점은 황금기를 맞이했을 때 왼팔을 받쳐줄 황금 오른팔이 함께 했다는 것이다. 쿠팩스는 돈 드라이스데일(1993년 타계)과, 커쇼는 잭 그래인키와 공포의 원-투펀치를 형성하며 리그를 함께 지배했다. LA시대에 다저스에게 처음으로 사이영상을 안겨준 주인공이기도 한 드라이스데일은 1963년 쿠팩스와 함께 팀의 99승 중 44승을 책임졌다. 월드시리즈에서 6번째 도전 만에 뉴욕 양키스를 제압할 때에도 쿠팩스와 3승을 합작할 만큼 위력적인 투수였다. 쿠팩스가 황금기를 구가하던 1963년부터 4시즌 동안 드라이스데일 역시 73승을 보태며 세 차례 월드시리즈 진출, 두 차례 우승을 이끌어냈다. 2013년 다저스와 6년 총액 1억 4700만 달러에 계약한 잭 그레인키는 커쇼 홀로 분투했던 다저스 선발진에 화룡정점이 됐다. 올해 12일까지 28경기에서 192.2이닝을 소화하며 16승 3패 방어율 1.68로 생애 첫 1점대 방어율, 양대리그 사이영상 수상 등에 도전 중이다. 시즌 초반 커쇼가 부진에 빠졌을 때 홀로 마운드를 지키다시피 고군분투한 그레인키 덕분에 다저스가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선두자리를 고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커쇼가 넘어야 할 과제는 분명 존재한다. 바로 가을에 약하다는 징크스다. 두 차례 월드시리즈 MVP를 수상한 쿠팩스와 달리, 커쇼는 통산 11차례 포스트시즌 등판에서 1승 5패 방어율 5.12로 저조했다. 쿠팩스 역시 포스트시즌에서는 통산 4승 3패로 승수를 많이 쌓지는 못했지만, 방어율 0.95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견인했다. 이를 두고 쿠팩스는 “100%가 되면 망가진다. 커쇼의 10월은 99%면 충분하다”며 후배의 선전을 기원했다. ‘신의 왼팔’을 든든히 받쳐주는 황금 오른팔이 있고, 또 이들을 받쳐주는 불펜진과 야수들이 있으니 너무 완벽히 던지려 노력하지 말라는 뜻이다. 커쇼가 가을의 전설로 등극한다면, 토미존 서저리가 개발되기 이전 팔꿈치 통증으로 조기 은퇴한 쿠팩스를 뛰어넘을 수 있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

zzang@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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