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멕시코시티=정다워 기자] 1983년 4월 16일. 명지대학교 3학년 노인호(66)가 태극마크를 달았던 날이다. 그로부터 불과 4년 뒤, 그는 축구화를 벗었다.

노인호는 한국 축구의 ‘숨은 천재’다. 당시로는 장신인 183㎝의 키에 100m를 11초대로 주파하던 스피드, 탁월한 골 결정력까지 갖춘 포워드였다. 중계진은 그를 ‘차범근 후계자’로 불렀다. 대학생 신분으로 국가대표팀에 갈 만큼 장래가 유망했다.

당연히 스카우트 경쟁이 붙었고, 그는 그해 7월 대우와 사인한 뒤 미국으로 대표팀 훈련에 나섰다. 당시 대우는 프로팀이 아니라 정식 계약이 불가능했다. 이 점을 이용해 현대가 영입전에 나서 프로 등록을 마친 9월 1일 노인호와 계약했다. 한 달여의 끈질긴 구애 끝에 노인호는 마음을 돌렸다. 11월엔 대우 구단 사무실을 찾아가 받은 계약금과 월급을 반납하며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대우는 가만있지 않았다. 이듬해 1월 노인호를 선수 등록했고, 그는 졸지에 ‘이중 등록 선수’가 됐다. 대한축구협회는 현대 손을 들었지만, 대우는 민사 소송 끝에 노인호로부터 위약금을 받게 됐다.

한참 선수로 활약해야 할 시기에 노인호는 스카우트 분쟁에 얽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여기에 교통사고를 당해 큰 부상이 겹치면서 프로축구 무대에서 4년간 28경기에 나서 2골 6도움에 그친 평범한 선수로 조기 은퇴하고 말았다.

은퇴 후 가족 일을 돕던 그의 운명은 1991년 완전히 바뀌었다. 조기 축구회 멤버의 소개로 멕시코 의류 사업을 알게 됐고, 세 번의 답사를 거친 후 거주하던 아파트 매매가에 준하는 20만불의 권리금을 들고 낯선 땅으로 떠났다. 멕시코 멕시코시티 현지에서 만난 노인호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30~40억원을 주고 모험을 택한 셈”이라며 웃었다.

사업은 호황이었다. 그는 “오픈하는 날 1만불의 매상을 올렸다. 3년간 어마어마하게 성장했다. 미국 시장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다”라면서 “멕시코에도 IMF가 와 어려운 시기도 있었지만 재기해 매장을 8개까지 늘렸다. 운동선수의 패기와 끈기로 사업에 임한 덕분”이라고 회상했다.

25년간 의류 사업을 하던 그는 최근 10년 동안 대형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평일, 주말을 막론하고 테이블이 꽉 찰 정도로 멕시코시티 현지에서 인기 있는 식당이다. 그는 “멕시코 사람들이 한국을 좋아한다. 케이팝이 인기를 끌면서 우리 식당도 더 ‘핫플’이 됐다. 이 사업을 하게 된 걸 기쁘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축구를 잊고 사업에 매진하던 그에게 운명처럼 월드컵이 찾아왔다. 멕시코가 2026 북중미월드컵을 개최하게 된 것. 공교롭게도 한국이 조별리그 세 경기를 모두 멕시코에서 치르게 됐다. 노인호는 “희박한 확률이지만 멕시코에서 경기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과를 보며 정말 기뻤다. 내가 있는 힘껏 응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2002 한일월드컵 때도 내가 교민 응원단장을 맡아 응원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현지에서 월드컵을 관전 중인 명지대 동기이자 절친인 김학범 전 올림픽축구대표팀 감독과 함께 경기장을 누비고 있다.

한국의 조별리그 두 경기를 모두 관중석에서 지켜 본 노인호는 “축구 관련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경기장에 가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치 내가 경기에 뛰는 것처럼 흥분이 됐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김 감독은 노인호에 관해 “정상적으로 스카우트가 되어 프로팀에 갔다면 1986 멕시코월드컵에 반드시 출전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대표팀에 더 이상 가지 못했지만, 40년 뒤 멕시코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한국을 응원하고 있다. 그는 “당시 내 별명은 ‘몸조리’였다. 그만큼 관리를 잘했기 때문에 축구를 제대로 했다면 오랫동안 뛰었을 것 같다”라면서 “축구로는 잘 풀리지 않았지만 멕시코에서 내 인생이 바뀌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이 땅에서 우리 대표팀이 좋은 결과를 얻길 바란다”라며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weo@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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