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의 몽환이 낳은 비극…덧없는 환상 대비 사랑

시대 유행 따른 ‘K-뮤지컬’ 선 넘은 ‘한국 창작 뮤지컬’ 위상

‘작품성·대중성’이라는 표현이 식상한 작품

22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4월 샤롯데씨어터서 재개막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칠흑 같은 어둠을 거둬낸 꽃잎이어라. 황홀하고 찬란한 꿈속의 여인은 활처럼 날아와 심장에 꽂힌다. 축복을 바란 미몽(美夢)은 광증의 저주가 되어 죽음의 자장가로 불리나니. 핏빛으로 붉게 물든 태양은 미몽(迷夢)의 검은 그림자가 거두리라. 하늘도 끊지 못한 연모의 정은 물결 따라 흘러온 조각배에 태워 천성도(泉城島)에서 다시 만나리. -편집자 주-

뮤지컬 ‘몽유도원’은 백제의 대표 민중 설화 ‘도미 부부’에서 탄생한 최인호 작가의 소설 ‘몽유도원도’를 현대 공연예술의 언어로 재해석한 사랑 이야기다. 아름다운 여인을 탐한 여경(개로왕), 가장 아름다운 것을 희생하고 사랑을 지킨 도미와 아랑의 극적인 드라마를 그린다.

한국 대표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 ‘영웅’을 제작한 ㈜에이콤이 세계 시장에 ‘한국적 소재’를 알리기 위해 제작된 작품이다. 2022년 초연 이후 기존의 우수한 기둥을 단단히 다져, 24년 만에 다시 숨을 불어넣었다. 동양적 탐미성과 현대적 심미성을 결합한 스펙터클은 K-뮤지컬의 새로운 신화를 예고한다.

욕망과 신념을 비애(悲哀)와 은애(恩愛)로 완성한 ‘여경’ 역 민우혁과 김주택, ‘아랑’ 역 한윤주와 유리아, ‘도미’ 역 이충주와 김성식이 강렬하고도 몽환적인 세계로 초대한다.

◇ 어긋난 운명의 장난…폭군의 권력에 맞선 백성의 외침

작품 속 3명의 주인공은 죽음을 뛰어넘은 위험한 사랑을 노래한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광기로 변질한 집착과 목숨보다 귀한 이를 위한 희생, 이들의 엇갈린 관계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대립한다. 칼날 같은 사랑은 부러지고, 운명에 맞서 지킨 도원에 다시 꽃이 핀다.

불안한 왕위와 고구려의 위협으로 인해 악몽에 쫓기던 ‘여경’은 단 하룻밤 꿈속의 품에 몸부림친다. 그에게 ‘아랑’은 어둠을 가른 빛의 한조각이며 숨 쉴 수 있는 천상 낙원 같은 존재다. 하지만 왜곡된 욕망에 사로잡혀 눈뜬장님이 된다. 권력을 앞세운 폭군이지만, 파괴의 이면에는 가엽고 애틋함이 가려져 있다.

‘아랑’과 ‘도미’ 설화는 사랑과 신의 안에서 부당한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여경’에게서 달아난 ‘아랑’은 강을 거슬러 온 조각배를 타고 ‘도미’와 재회한다. 그는 스스로 아름다운 얼굴을 잃음으로써 비극의 소용돌이를 멈춘다. 과거 수동적인 열녀의 이미지를 넘어, 신념과 신의를 끝까지 지키는 주체적 여성을 형상화한다.

‘도미’는 권력자의 덫에 걸리지만, 아내 ‘아랑’과 목지국 후손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 두 눈을 잃은 슬픔을 피리에 담아 구슬픈 신호를 전한다. 그 소리의 끝은 비로소 사랑하는 이에게 닿아, 자유를 갈망하는 희망의 메시지로 남는다.

◇ 곡선으로 완성한 한폭의 수묵화 vs 지극히 형식적인 차가운 직각 구도

‘몽유도원’에는 시대 유행에 따른 ‘K-뮤지컬’보다 ‘한국 창작 뮤지컬’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유호진 연출은 초연 이후 ‘한국적인 것은 세계적인가’라고 질문의 깊이를 확장했다. 원작의 서사적 고증을 동시대적 보편성을 재해석해 ‘한국적 뮤지컬’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세계의 언어인 ‘사랑’은 한국의 정서와 서양의 장치로써 우리 정서만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탁영환 수묵영상디자이너가 직접 그린 수묵화는 스크린을 뚫고 나온 극강의 몰입감을 선사한다. 무대 전면에 설치된 LED 화면을 통해 빛과 색의 변화를 바닥과 양 벽면까지 드리워 강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묵으로 붓칠한 흑과 백의 배경은 불길한 핏빛으로 물들고 눈물로 뒤엉킨 차가운 빗줄기를 뿌린다.

한정된 공간에서 복잡하고 미묘하게 얽힌 ‘선’은 미몽과 악몽을 대립시킨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듯 ‘강’으로 시작한다. 이들의 엇갈린 운명처럼 나루터를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흐른다. 그 위에 뜬 태양과 달은 고난과 역경 앞에서 서로 교차하며 심리적 기능을 수행한다. 직선과 정제된 질감의 궁궐과 부드럽고 잔잔한 도원은 서로 다른 세계관의 가치관을 보여준다.

◇ 한국적 미학에 현대 공연예술을 더하다

여백의 미를 살린 무대는 적막을 깨는 넘버와 춤, 의상으로 정체성을 각인시킨다.

‘몽유도원’의 모든 음악은 뮤지컬 장르에 동서양의 균형과 절제를 입힌 크로스오버로 펼쳐진다. 대금과 피리가 리드하고, 해금·거문고·태평소·꽹과리 등이 클래식 오케스트라, 일렉트론과 공존하며 웅장한 절경을 이룬다. 배우들은 판소리, 정가, 뮤지컬 등 다양한 발성을 넘나들며 작품의 고유성을 정의한다.

오상준 작곡가와 양재선 작사가는 사랑이 빚어낸 관계의 서사에 초점을 맞췄다. 인간의 감정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순간을 무대 위에서 실현하기 위해 인물들이 마주하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광기의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음악의 결에 동양의 미학을 녹인 비언어적 요소를 구현한 안무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작품의 대표 장면으로 꼽히는 ‘흑과 백’은 계략을 꾸민 ‘여경’과 그 덫에 걸린 ‘도미’의 심리전을 실감 나게 그려낸다. 바둑판의 흑돌과 백돌로 변신한 앙상블이 무대 위에서 치열한 쟁탈전을 펼치는 장면은 장관 중의 장관이다.

작품은 개인의 희생을 통해 공동체가 유지되는 제의적 세계로 해석한다. 인간과 신성 간의 경계에 서 있는 도원의 부족은 제의의 일부로, 한복의 곡선·여백·겹침의 미학을 현대 감각으로 제작했다. 희생을 감내하는 인물의 의상은 보호 장치가 아닌 절제된 운명의 역할을 나타낸다. 반면 권력과 억압의 대상은 무게감과 밀폐된 구조로 단단함과 불안정한 존재임을 동시에 드러낸다.

가장 아름다움을 지워서라도 영원히 지키고 싶은 사랑을 노래하는 ‘몽유도원’은 2월 22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 이후 한 달여간의 재정비를 마친 후 4월 11일부터 5월 10일까지 서울 송파구 샤롯데씨어터에서 단 한 달만 관객들을 다시 만날 예정이다.

gioi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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