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고진현전문기자] 사건과 사고의 표면적인 기술(記述)보다 중요한 것은 맥락에 숨어 있는 의미와 현상 뒤의 숨어 있는 본질의 해석이다. 역사는 사실(事實·fact)이 아니라 사실(史實·historical fact)이라는 탁견(卓見)도 바로 그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건 사고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 이유는 자칫하면 퇴행의 역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대한축구협회(회장 정몽규)의 사면사태는 궁금증 투성이다. 협회의 사면이 국민의 공분을 일으켜 사흘만에 철회되기는 했지만 국민적 정서와 동떨어진 사면이 왜 단행됐는지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다. 뭔가 모를 꿍꿍이가 숨어 있었고 그 이유를 밝히는 데 불편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파편화된 정보를 종합하고 조각난 그림을 하나 둘씩 맞춰보자. 사흘만에 해프닝으로 막을 내린 사면사태의 숨은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협회는 지난달 28일 각종 이유로 징계를 받았던 축구인 100명에 대한 사면을 발표했다가 여론의 집중포화가 쏟아지자 사흘 뒤 긴급이사회를 열고 이를 철회했다. 그리고선 묵묵부답이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수많은 의혹에도 협회가 ‘침묵 모드’로 일관한다는 건 이번 사태에 많은 게 숨어 있다는 방증이다. 대체적으로 이런 문제는 조직의 수장과 관련돼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대한축구협회 정몽규 회장은 최근 온갖 악재에 둘러싸여 있는 모양새다. 숫제 벼랑 끝이다. 우선 대통령이 관심을 표명했던 아시안컵 유치에 나섰다가 고배를 마시면서 정부에 크게 밉보였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설상가상, 정 회장의 기업인 HDC현대산업개발이 지난 2022년 광주 화정동 아파트 붕괴사고로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는 마당이라 기업인의 입장에선 불안감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카타르월드컵 16강진출이후 꼬리를 문 이상징후(?)도 이러한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데 단단히 한몫을 했을 게다. 정 회장은 대통령이 주재한 대표팀 환영 만찬회에도 초청받지 못했고,더욱이 대통령이 툭 던진 의미심장한 발언은 날선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꽂혔다.

대통령이 “월드컵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이 제대로 보상받았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협회에 직격탄을 날린 게 다양한 해석을 낳게 했다. 협회가 선수들이 받아야 할 몫을 빼앗았다는 뉘앙스에 화들짝 놀란 정 회장은 곧바로 사재 20억원을 격려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조각난 정보를 종합해보면 ‘사흘 해프닝’으로 막을 내린 협회의 축구인 사면사태는 정 회장의 힘겨운 상황, 타깃을 좀더 좁힌다면 결국에는 차기 회장 선거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으로 의견이 모아진다.

정 회장 스스로가 직감할 정도로 이상기류가 거셌던 만큼 차기 회장선거에서 축구인들의 환심을 사는 카드(?)가 절실했다고 보는 시선이 많다. 그래서 국민정서와 동떨어진 축구인 100명 사면이 이뤄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체육계만큼 권력의 움직임에 민감한 분야는 없다. 정 회장이 정부,더 나아가 대통령으로부터 미운 털이 박혔다고 보면 반대세력 쪽에선 이를 차기 회장 선거구도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정 회장은 축구인들의 마음을 살 수 있는 인기 만회용 카드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축구인 사면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해석이 우세하다.

정 회장은 협회장 선거가 대규모 선거인단 제도로 바뀐 만큼 축구인들의 마음을 살 수 있는 포퓰리즘을 궁여지책으로 내놓았을 수 있다. 정 회장 본인이 아니더라도 정 회장쪽 인사들은 그가 연임해야 자신들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기에 사면카드를 부추겼을 가능성이 높다.

차기 회장 선거는 아직 1년이 넘게 남았지만 지금의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아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축구협회장은 체육계에선 노른자위로 통한다. 대한체육회 회원종목 단체 가운데 체육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체적인 예산을 꾸릴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단체가 바로 축구협회이기 때문이다. 탄탄한 재정자립도에다 1년 예산이 물경 1000억원에 육박하는 거대한 조직인 만큼 축구협회장 자리는 많은 사람들이 탐내는 그런 자리다.

현대가(現代家)의 롱런에 대한 반대세력의 도전도 만만치 않다. 정몽준 회장이 대한축구협회 제 48대 수장에 오른 1997년부터 현대가의 축구협회장 독식은 무려 27년째 계속되고 있다. 이는 정몽규 회장에게 위기의식을 더해주는 또 다른 요소 중 하나다.

정 회장은 지난 2013년 제 52대 회장 취임에 이어 3번째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지만 정작 국제 외교력에선 기대치를 밑돌고 있다는 사실도 약점이다. 본인도 이를 만회하려는 듯 최근 국제축구연맹(FIFA) 평의회 위원선거에 나섰지만 뜻을 이루지 못해 FIFA 집행부 진입에 또다시 실패했다. 그야말로 온갖 악재가 한꺼번에 몰아닥친 꼴이다.

한국 정치가 진흙탕 싸움으로 내몰린 데는 포퓰리즘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사태는 결국 차기 선거를 염두에 둔 포퓰리즘의 산물이라는 게 가장 유력해 보인다.

포퓰리즘이 축구협회장 선거에까지 넘어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리고 쓰리다. 표를 얻어려다 국민의 마음을 잃었다. 축구협회 사면사태의 숨어 있는 검은 실루엣,선거 포퓰리즘이라는 괴물이 축구계를 배회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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