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김현덕 기자] 처음에는 침묵한다. 반응이 커지면 편집한다. 더 커지면 사과한다. 그러나 다음 프로그램에서는 또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최근 방송가의 민낯이다.

더 큰 문제는 책임의 비대칭이다. 논란이 터지면 비난은 출연자에게 집중된다. 특히 일반인 출연자는 방송 문법에 익숙하지 않다. 제작진처럼 사후 대응 시스템을 갖고 있지도 않다. 매니지먼트도 없다. 방송이 만든 캐릭터는 남지만, 그 캐릭터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개인이다.

프로그램은 다음 회차로 넘어가지만, 출연자는 댓글과 DM, 신상 털기와 조롱을 현실에서 견뎌야 한다.

최근 최근 ENA·SBS Plus ‘나는 SOLO’ 31기 논란은 방송가가 갈등을 화제성으로 소비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방송에서는 여성 출연자 일부가 한 출연자를 향해 부정적인 말을 주고받는 장면이 공개됐다. 이후 방송은 ‘왕따 논란’으로 번졌다.

논란은 출연자 개인에게 향했지만, 프로그램은 TV·OTT 통합 비드라마 화제성 순위 1위에 오르며 전주 대비 화제성이 급상승했다. 불편함은 비판으로 번졌고, 비판은 다시 프로그램의 성과로 집계됐다.

JTBC ‘이혼숙려캠프’도 사적 갈등을 콘텐츠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갓생부부’ 편에서는 남편이 아내에게 공부와 생활 관리를 요구하고, 홈캠으로 감시하는 모습 등이 방송됐다. 제작진은 이를 부부 문제를 진단하는 상담 서사로 배치했지만, 시청자에게는 관계 회복보다 통제와 갈등의 장면이 강하게 남았다. 또 일부 출연 부부가 다른 방송에서도 유사한 고민을 털어놓은 사실이 알려지며 진정성 논란도 불거졌다.

MBN ‘고딩엄빠’는 취약한 출연자의 삶을 예능 문법으로 다룰 때 생기는 위험을 보여준다. ‘고딩엄빠2’ 출연자 하리빈은 방송 이후 SNS를 통해 제작진 개입과 편집 왜곡 의혹을 제기했고, 제작진은 조작은 부인하면서도 일정 부분 개입은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 미성년자와 성인의 임신·출산 사연을 다룬 방송분은 미화 논란에 휘말렸다. 청소년 부모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취지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민감한 삶이 자극적 갈등 구조로 소비됐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세 프로그램은 장르와 소재가 다르다. 그러나 구조는 닮아 있다. ‘나는 SOLO’는 출연자 간 갈등을 연애 서사의 긴장감으로 만들었고, ‘이혼숙려캠프’는 부부의 사적 불화를 상담 예능의 소재로 삼았으며, ‘고딩엄빠’는 취약한 청소년 부모의 현실을 갈등 중심으로 편집했다. 논란은 출연자가 감당했지만, 화제성은 프로그램이 가져갔다.

물론 출연자의 부적절한 언행까지 제작진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방송에 등장한 말과 행동에는 당사자의 책임이 있다. 그러나 방송사는 그 장면을 내보내는 순간, 그 책임의 일부를 함께 진다.

리얼리티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시청자가 보고 판단하게 하겠다는 말도 충분한 방패가 되지 못한다. 보여주는 방식 자체가 이미 판단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한 방송 관계자는 “리얼리티 예능은 출연자의 실제 반응을 기반으로 하지만, 방송에 나가는 순간 그것은 제작진이 선택한 서사가 된다. 어떤 말을 살리고, 어떤 표정을 반복해 보여주고, 어떤 자막을 붙이느냐에 따라 시청자의 판단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논란이 될 만한 장면을 무조건 덜어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일반인 출연자가 감당해야 할 후폭풍까지 고려하는 편집 기준은 필요하다. 화제성만 보고 장면을 밀어붙이면 결국 프로그램 신뢰도도 함께 깎인다”고 짚었다.

논란은 콘텐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논란이 콘텐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방송가에 필요한 것은 더 센 장면이 아니다. 멈출 줄 아는 편집이다. khd9987@sportsseoul.com

기사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