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글·사진 | 양평=원성윤 기자] 초여름의 짙푸른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양평의 굽이진 국도 위로, 숨을 멎게 할 만큼 강렬한 붉은색 스포츠카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등장했다. 영국의 정통 경량 스포츠카 브랜드 로터스가 선보이는 순수 내연기관의 마지막 모델, ‘에미라(Emira)’다.
아스팔트의 지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도로 위에서 이 아찔한 자태를 마주하고 시동을 거는 순간, 올해 가요계에 ‘청량 보이스’ 돌풍을 일으킨 보이그룹 투어스(TWS)의 데뷔곡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가 카오디오를 타고 흐른다. “첫 만남은 너무 어려워,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경쾌하고 맑은 신스팝 선율 위로 흐르는 이 노랫말은, 로터스 에미라가 품고 있는 극적인 반전 매력을 설명하기에 더없이 완벽한 메타포로 다가온다.


로터스는 자동차 마니아들 사이에서 ‘타협 없는 스파르탄’으로 불려왔다. 오직 달리기 위해 에어컨이나 라디오조차 덜어내던 과거의 극단적인 경량화 철학 때문이다. 하지만 에미라의 첫인상은 그러한 선입견을 보기 좋게 빗나간다. 20억 원을 호가하는 로터스의 전기 하이퍼카 ‘에바이야(Evija)’의 공기역학적 디자인 코드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에미라는, 투어스 멤버들의 청량한 미소처럼 매끈하고 유려한 실루엣을 자랑한다. 정면에서 바라본 날렵한 세로형 LED 헤드램프와 보닛 위로 깊게 파인 두 개의 에어 벤트는 단순한 시각적 장식을 넘어, 공기를 가르고 노면을 향해 차체를 짓누르는 철저한 기계공학적 다운포스의 결과물이다.


차량을 한 바퀴 돌아 측면으로 향하면, 미드십 스포츠카 특유의 황금 비율이 시선을 압도한다. 운전석 문 뒤쪽으로 큼직하게 뚫린 측면 흡기구는 당장이라도 주변의 공기를 집어삼켜 엔진의 열기를 식힐 듯 공격적이다. 우아하게 뻗은 곡선과 잔뜩 성난 근육질 펜더의 볼륨감은 정차해 있는 순간에도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한 아찔한 텐션을 유지한다. 지면에 바짝 엎드린 이 압도적인 스탠스는 도로 위의 그 어떤 차들보다 독보적인 존재감을 내뿜는다.



에미라가 선사하는 ‘첫 만남의 반전’은 육중한 문을 열고 실내에 들어설 때 절정에 달한다. “로터스가 이렇게 호화롭다고?”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눈과 손이 닿는 모든 곳이 화사한 탠(Tan) 컬러의 최고급 가죽과 알칸타라 소재로 아낌없이 덮여 있다. 스티어링 휠 너머로는 12.3인치 디지털 클러스터가 시원한 시야를 제공하고, 센터패시아 중앙에는 10.25인치 터치스크린이 자리 잡아 최신 스마트폰과의 연동을 돕는다. 정교하게 가공된 금속 소재의 물리 버튼들은 조작할 때마다 기분 좋은 ‘딸깍’거림을 선사한다. 편의성을 극대화한 이 공간은 일상적인 출퇴근용 데일리카로 써도 전혀 무리가 없을 만큼 다정하고 친절하다.


주행을 시작하기 위해 센터 콘솔에 위치한 주행 모드를 ‘투어(Tour)’에 맞추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투어스의 맑고 기분 좋은 멜로디처럼, 에미라는 양평의 호반 도로를 부드럽고 여유롭게 유영한다. 생각보다 정제된 엔진음과 유연한 서스펜션 반응은 “이 정도면 장거리 여행도 거뜬하겠다”는 안도감을 준다. 하지만 이 친절함은 어디까지나 에미라가 숨겨둔 야성을 철저히 감춘 ‘계획된 다정함’일 뿐이다.
끝없이 펼쳐진 직선 도로를 마주하고 주행 모드 스위치를 조작해 ‘스포츠(Sport)’ 모드로 변경하는 순간, “계획대로 되지 않는” 진정한 통제 불능의 쾌감이 온몸을 덮친다. 운전석 바로 등 뒤에 똬리를 틀고 있던 V6 수퍼차저 엔진이 잠에서 깨어나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거칠고 날카로운 숨소리를 뿜어낸다. 얌전했던 고양이가 발톱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도로 위의 맹수로 돌변하는 찰나다. RPM 게이지가 치솟을 때마다 머리 뒤쪽에서 폭발하는 독특하고 강렬한 배기음은 그 어떤 하이엔드 오디오 시스템보다 심장 박동을 빠르게 뛰게 만든다.



차체가 한없이 낮게 설계된 정통 스포츠카이기에, 에미라는 노면의 상태를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 아스팔트의 미세한 균열부터 과속 방지턱의 곡률까지, 도로의 모든 질감과 정보를 서스펜션과 시트를 통해 운전자의 척추로 가감 없이 전달한다. 누군가에게는 이 날것의 감각이 피곤함으로 다가올지 모르지만, 진정한 운전의 즐거움을 탐구하는 이들에게는 도로와 내가 완벽하게 대화하고 교감하는 황홀한 순간이다.
특히 에미라 주행의 백미는 고속 영역에서 발휘되는 스티어링 휠의 감각이다. 전자식 파워 스티어링(EPS)이 지배하는 요즘 시대에, 로터스는 뚝심 있게 유압식 스티어링 시스템을 고집했다. 속도가 높아질수록 운전대는 양손에 기분 좋은 묵직함을 더하며, 운전자가 조향각을 밀리미터 단위로 섬세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극상의 피드백을 제공한다. 코너를 예리하게 파고들 때마다 노면을 꽉 움켜쥐고 돌아나가는 끈적한 그립력은 두려움 대신 “더 세게 밟아보라”는 기계의 유혹처럼 느껴진다.




전기차의 조용하고 차가운 모터 회전에 점차 익숙해져 가는 시대다. 하지만 엔진의 끓어오르는 고동을 느끼고, 맹수의 포효를 귀로 들으며, 내 손발의 조작에 따라 기계가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이 원초적인 쾌감은 오직 내연기관 스포츠카만이 줄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영역이다.
투어스의 데뷔곡이 천편일률적인 가요계에 ‘기분 좋은 반전’을 선사하며 신선한 충격을 주었듯, 로터스 에미라는 점차 저물어가는 내연기관 시대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잊고 지냈던 ‘순수한 운전의 본질’을 가장 화려하고 짜릿한 방식으로 일깨워준다. 땀방울이 맺힐 만큼 치열하게 스티어링 휠과 씨름하고 차에서 내리는 순간, 당신은 분명 이 붉은 맹수와의 첫 만남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socool@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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