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학산 골짜기에서 피어난 희망, “신앙이 더욱 깊고 단단하게 자란 곳”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졌던 곳

최양업 신부, “거창한 말보다 삶으로 사랑을 증명했던 인물”

‘신앙의 휴게소’, “지친 삶을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자리”

[스포츠서울 | 글·사진 이상배 전문기자] 봄과 여름이 서로의 경계를 천천히 넘겨주고 있는 계절이다. 산과 들은 어느새 짙은 초록으로 물들고 있었고, 아카시아와 이팝나무에는 하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마치 하늘에서 눈꽃이 내려앉은 듯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들녘에서는 모내기를 준비하는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산자락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유난히도 잔잔하고 평화롭다. 그 길 끝에서 마주한 곳이 바로 충북 제천 구학산 자락에 자리한 배론성지다.

성지에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고요함’이다. 도시의 소음과 일상의 분주함은 어느새 멀어지고, 숲길 사이로 들려오는 새와 바람 소리만이 순례객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다.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온 신앙의 시간과 순교자들의 기도가 깊숙이 스며든 침묵이다. 그래서인지 배론성지의 공기는 유난히 묵직하면서도 따뜻하다. 마치 오랜 시간 지친 마음을 기다려온 공간처럼 순례객의 영혼을 조용히 감싸 안는다.

‘배론’이라는 이름은 배 밑바닥처럼 움푹 들어간 지형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이름 안에는 단순한 지리적 의미를 넘어선 한국 천주교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조선 후기 혹독한 박해 속에서 신앙인들은 세상을 피해 이 깊은 골짜기로 숨어들어야 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척박한 땅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곳에서 한국 교회의 신앙은 더욱 깊고 단단하게 자라났다.

배론성지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졌던 곳이다. 당시 젊은 신학생들과 사제들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박해와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용히 기도했고, 배움을 이어갔으며, 끝내 자신의 생명까지 신앙 안에 봉헌했다. 병인박해의 칼날은 그들의 육신을 쓰러뜨렸지만, 믿음까지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순교는 한국 교회를 더욱 굳건하게 세우는 씨앗이 되었다.

성지를 걷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현대인들의 삶은 쉼 없이 빠르게 흘러간다. 경쟁과 불안, 성과와 속도에 밀려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몸은 쉬어도 마음은 쉬지 못하고, 사람들 속에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는 시대다. 그런 시대 속에서 배론성지는 단순한 순례지가 아니라 ‘영혼의 쉼터’로 다가온다.

특히 이곳에는 한국인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땀의 순교자’라고 부른다. 그는 화려한 삶과는 거리가 먼 사제였다. 험한 산길을 수없이 넘으며 교우들을 찾아다녔고, 병든 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곁을 지켰다. 당시 조선의 교우촌은 대부분 깊은 산골에 흩어져 있었기에 사목 활동 자체가 생명을 건 여정이었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

최양업 신부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그는 거창한 말보다 삶으로 사랑을 증명했던 인물이었다. 누군가의 곁에 끝까지 머물러주는 것, 아픈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것,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신앙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묘소 앞에 서면 많은 순례객이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저마다 가슴속에 담아온 상처와 기도 제목들을 조용히 내려놓는다. 누군가는 가족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고, 누군가는 삶의 방향을 묻고, 또 누군가는 지친 마음에 위로를 청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평화를 얻는다. 그것은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조용히 건네시는 위로의 숨결 같은 것이다.

배론성지 주임신부는 대성전에서 봉헌된 미사 강론에서 이곳을 ‘신앙의 휴게소’라고 표현했다.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휴게소는 목적지가 아니다. 그러나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간이다. 어쩌면 신앙도 그렇다. 신앙은 현실을 떠나기 위한 도피처가 아니라, 지친 삶을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자리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쉼’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진정한 평안을 얻기는 쉽지 않다.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마음은 더 메말라가고, 관계는 많아졌지만 외로움은 더 깊어졌다. 그런 시대 속에서 배론성지는 조용히 말한다.

“잠시 멈추어도 괜찮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걸어가면 된다”라고...

초록이 더욱 짙어가는 계절 속에서의 배론성지 순례는 단순한 여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돌아보고, 잊고 지냈던 감사와 평화를 다시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또한 순교자들의 삶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서로에게 작은 위로와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은총의 시간이었다.

깊은 골짜기 속에서 꺼지지 않았던 신앙의 불빛은 오늘도 여전히 배론성지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빛은 지치고 흔들리는 우리의 삶에도 조용히 스며들어 다시 살아갈 용기와 평화를 건네고 있다.

sangbae0302@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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