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배우에게 쥐약 같은 단어가 있다. ‘정의’다. 바르고 의로움에 벗어남이 없다는 뜻이다. 정의로움을 표현하기란 영 쉬운 일이 아니다. 바른 자세로 옳은 말을 함으로 이야기의 중심이 될 수는 있으나, 캐릭터의 매력을 살리기엔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예측가능한 언행의 정의로운 인물은 아쉽게도 매력적이지는 않다.

정은채는 세 작품 연속 ‘정의’를 표현했다. tvN ‘정년이’ 속 매란국극단 문옥경과 JTBC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이하 ‘김 부장’)의 리더십 넘치는 이주영 반장, ENA ‘아너: 그녀들의 법정’ 로펌 대표 강신재다. 어려울 수밖에 없는 미션인데, 정은채는 제각각의 매력으로 승리의 리더십을 그려냈다.

‘정년이’의 문옥경은 국극 내 최고 스타이자, 기자들도 뒤를 쫓는 전국구 스타기도 하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매란 국극의 길을 여는 인물이다. 공적 욕망이 사적 욕망보다 더 큰 재목이다. 소리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정년(김태리 분)을 발굴하고, 그의 능력을 인정해 자신의 뒤를 이을 남성 역할 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정년이 가진 단점을 미리 파악하지만, 굳이 먼저 알려주지 않고 알아서 알에서 깨길 천천히 기다릴 줄 알기도 한다. 도움이 필요할 때 적극 나서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영리함도 있다.

막 입어도 되는 의상에 작업조끼를 걸치고 헬멧을 눌러 쓴 ‘김 부장’ 속 이주영도 매력적이긴 마찬가지다. 힘든 일을 나서서 도맡으며, 누구 하나 서운하지 않도록 알뜰살뜰 챙긴다. 자신이 손해보더라도 저항에 앞장서는 강단도 있고, 불의에 맞설 줄도 안다. 고마움을 온전히 표현할 줄 아는 선량함도 있다. 귀족적인 이미지가 강한 정은채는 공장 노동자로 변신하는 가운데에도 인물이 가진 담대함을 절제해서 표현했다.

‘아너: 그녀들의 법정’의 강신재는 극강의 자존감 덩어리다. 이혼을 두 번 했다는 치부를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다. 친구가 위기에 처했을 땐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선다. 거대 악과 싸우기 위해서라면 비록 정당하지 못한 방법이더라도 과감히 꺼낸다. 삶이 고달파질지언정, 주위 사람들이 불의하게 당하는 건 못 보는 인물이다.

덕분에 명대사도 많다. 윤라영에게 버팀목이 될 때 “가 계속. 뒤는 내가 감당할게”라거나, 권중현(이해영 분)의 배신을 목도한 순간 “대한민국 법은 아저씨가 한 짓을 프라이버시가 아니라 범죄라고 불러요”라는 일갈은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만든다. 과거의 상처로 매일 ‘나쁜 꿈’을 꾸는 것 같다는 윤라영에겐 “그럼 나쁜 꿈을 계속 꾸자. 우리도 거기 있을게. 네 험한 꿈속에”라고 다독이는 장면은 뭉클하다. 어쩌면 오글거릴 수 있는 대사인데, 정은채라서 묵직하고 진실하게 들린다.

바르고 정의로운 리더는 자칫 현실성 없는 판타지나 답답한 훈장님으로 전락하기 쉽다. 하지만 정은채는 특유의 서늘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눈빛과 호흡 등 섬세한 디테일로 인물에 ‘인간적인 틈’을 만들어냈다. 덕분에 그가 연기한 리더들은 단순히 정의로운 것을 넘어, 기꺼이 곁을 내어주고 싶고 따르고 싶은 ‘동경의 대상’으로 숨을 쉰다. 세 작품을 통해 정은채가 창조한 인물은 시대가 원하는 ‘워너비 여성상’ 그 자체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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