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이승록 기자] 아리따운 건, 이효나의 연기다.

어릴 적에는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조차 손끝이 떨릴 만큼 수줍음이 많았다.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할 정도로 노래를 사랑했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타인 앞에 꺼내 놓는 것은 높은 벽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노래하던 이효나.

하지만 인터뷰를 마치고, KBS2 ‘친밀한 리플리’ 속 그의 연기를 다시 찾아보니 일종의 경이로움마저 느껴진다. 카메라를 집어삼킬 듯한 눈빛, 저주를 퍼붓는 입술, 무너져내리듯 쏟아내는 눈물. ‘누가 진짜 이효나일까’ 싶을 정도로, 지금의 이효나는 극과 극의 얼굴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배우로 피어났다.

▲ 기술이 아닌 ‘동화(同化)’로 빚어낸 오열

‘친밀한 리플리’에서 이효나는 주영채라는 인물에 녹아들어 광기를 표출했다. ‘진짜’의 삶을 부정당한 여인. 주영채는 매일 저녁 시청자들을 분노하게 했지만, 그 표독스러운 가면 뒤에는 촬영 내내 눈물을 머금고 있던 배우 이효나가 서 있었다. 대본을 암기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기술적인 연기 대신, 캐릭터의 비극에 온전히 공감하고 자신을 투영해 진심을 빚어내는 게 우선이었다.

이효나에게 주영채는 단순히 평면적인 악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친엄마에게조차 가짜 취급을 당하며 인생을 도둑맞은, 지독하게 결핍된 영혼이었다. 이효나는 비극적인 서사를 받아들이기 위해 주영채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영채의 행동이 어쩌면 불편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저는 영채가 짠했어요. 사랑을 갈구했지만 학대와 트라우마 속에 방치됐던, 사실은 살기 위해 발버둥쳐야 했던 외로운 친구거든요.”

이러한 진심은 화면에 고스란히 전이됐다. 이효나는 “큐!” 사인에 맞춰 눈물을 짜내는 기술을 부리지 않고, 주영채의 슬픔을 제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만 집중했다. 촬영 전날부터 감정을 끌어안고 있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다. 이효나의 눈물 연기에는 결코 화면에 예쁘게 보이려는 계산이나 배우의 허영은 존재하지 않는다. 처절하게 스러져 내리던 주영채, 그 자체가 곧 이효나였다.

▲ 카메라, 세상과 ‘진짜 이효나’를 이어주는 통로

실제의 이효나는 걱정 인형에 가깝다. 인터뷰 전날부터 어떤 질문이 나올까 걱정하며 밤잠을 설치고, 자신의 연기를 끊임없이 복기하며 모니터링을 반복한다.

그런 이효나가 카메라 앞에서 만큼은 누구보다 담대해진다는 사실은 그가 ‘천생 배우’임을 실감케 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 도전했던 소극장 연극 무대도 이효나에게 소중한 자양분이 됐다. 관객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경험들은 이제 어떤 날 선 대사도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는 단단한 뿌리가 되어 그의 연기를 지탱하고 있다.

“예전에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게 힘들었어요. 하지만 연기는 신기해요. 제가 표현하는 감정이 영상을 통해 시청자분들에게 전달되었을 때, 그 순간의 감정이 참 좋더라고요. 그러면서 점점 연기에 대한 욕심이 커졌던 것 같아요.”

▲ 하이힐을 벗고, 연기의 심연을 향해 내딛는 걸음

화면 속 주영채는 높은 하이힐과 화려한 의상으로 무장한 디자이너였지만, 카메라 밖 이효나는 편안한 차림에 모자를 눌러쓰고 공원을 산책하는 소박한 청춘이다. 공원의 토끼와 물고기를 보며 마음을 정화하는, 이토록 투명한 내면을 가진 그가 꿈꾸는 다음 단계는 의외로 더 깊고 고요한 감정의 우물이다.

“언젠가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이지안 같은 캐릭터도 꼭 연기해보고 싶어요. 지금처럼 화려한 모습이 아니더라도요. 감정의 폭이 큰 연기는 사실 제가 평소에는 느껴보지 못하는 것들이잖아요. 그런 연기를 통해 오히려 제 안의 무언가가 해소되는 기분이 들거든요.”

‘효도 효(孝), 아리따울 나(娜)’. 연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TV 앞에 앉아 시상식을 보며 ‘나는 언제쯤 저 자리에 설 수 있을까’를 막연히 꿈꾸던 아이가 이제 어엿하게 연기대상 초대장을 거머쥐는 주연 배우로 성장했다.

슬플 때는 슬픈 영화를 보며 감정을 쏟아낸다는 이효나. 그의 연기에는 화려한 외양이 가릴 수 없는 묵직한 중심이 자리한다. 안정적인 발성으로 극에 무게를 더하고, 깊은 눈빛으로 기어코 시청자들의 마음까지 붙잡는 힘. 101부작이라는 긴 여정 끝에 주영채마저 완전히 삼켜버린 이효나의 연기는 얼마나 더 깊어졌을까. 그가 한치의 감정도 남기지 않고 쏟아낼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roku@sportsseoul.com

기사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