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기자] JTBC ‘힘쎈여자 강남순’(이하 ‘강남순’)을 보고 있으면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게 체감된다. 특히 황금주 역의 배우 김정은의 변신이 그렇다.

2000년대 초반 김정은은 청순가련형의 아이콘이었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대사로 국민들에게 에너지를 줬고, SBS ‘파리의 연인’(2004)의 “애기야”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캔디형 멜로드라마가 주류였던 당시 수많은 작품을 이끈 장본인이다.

청순하고 가련한 김정은을 ‘강남순’에선 볼 수 없다. 황금주는 구시대 남성들이 가진 성질을 그대로 입었다. 혹자는 ‘모(母)부장제’라고 한다. “돈은 내가 벌어다 줄게. 집에서 애나 잘 봐”라는 대사를 던지고, 집안의 대소사를 독단적으로 결정한다. 또 불의를 맞서 정의로운 싸움을 이어간다.

황금주는 3000만원 종자돈으로 시작한 선지해장국 음식점의 초대박을 시작으로 하는 사업마다 성공하면서 대한민국에서 현금을 가장 많이 보유한 기업 금주그룹 총수가 됐다. 아울러 초능력에 가까운 괴력도 지녔다. 결핍이라곤 몽골에서 잃어버린 딸 강남순(이유미 분) 밖에 없다.

김정은은 “그간 사실 파워풀하고 임팩트 있는 역할은 해본 적이 없었다. 카리스마는 처음 경험 했다. 강인함과 거리가 있는 이미지였다. 첫 시도였는데 반응이 오는 걸 보면서 희열이 있었다”라고 기뻐했다.

◇“백미경이라는 세 글자면 충분, 여성의 공조와 연대 멋있어”

누군가 원하는 삶을 택하라는 질문이 있다면, 황금주가 후보에 오를만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이 되는 자금을 보유 중이다. 재벌이 모든 현금을 주식에 투자하는 것과 달리 자수성가한 황금주는 현금 부자다. 아울러 힘도 세다. 툭 치면 저 멀리 날아가고, 울대만 잡아도 상대를 완벽히 제압한다. 부러울 게 없다. 심지어 오토바이를 타곤 날아다닌다.

“요즘 말로 플렉스하는 인물이에요. 카타르시스를 많이 느끼면서 촬영했어요. 힘이라는 게 물리적인 힘도 있지만 사회적인 권력에서 오는 힘도 있잖아요. 여러 면에서 여자는 약자일 수 있는데 ‘강남순’은 이걸 비틀었죠. 풍자와 해학이 있고요. 이제껏 보지 못한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재미가 있었죠. 사실 액션은 별것 없었어요. 한 번 잡아 올리면 끝나니까요. 하하.”

‘강남순’의 백미경 작가는 여성 서사 드라마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힌다. 특히 JTBC ‘힘쎈여자 도봉순’과 tvN ‘미인’은 수많은 여성 팬을 흡수했다. 김정은도 그중 하나다. 백 작가의 필력에 매료돼 ‘강남순’에 합류했다.

“백미경이라는 세 글자면 안 할 이유가 없죠. 그간에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형태로 여자가 여자를 대적하는 부분이 드라마에서 많이 표현됐던 것 같아요. 반대로 백 작가님은 공조와 연대를 내세우잖아요. 팬으로서 대본을 읽었을 때 ‘구현된다면 멋있겠다’는 생각으로 임했어요. 황금주는 사실상 남자에 가까워요. 가부장적인 아버지 설정으로 다가갔던 것 같아요. 계속 명령하고, 답도 짧고요. 물론 아버지 세대를 폄훼하는 건 아니에요.”

◇“‘강남순’ 덕에 피 끓어, 이젠 ‘노 개런티’도 괜찮아”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작품 활동이 줄어든다. 영화나 드라마는 물론 예능까지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했던 것에 비해 소극적으로 움직였다. 드라마도 MBN ‘나의 위험한 아내’(2020) 이후 3년 만이다.

너무 열심히 일했던 20대를 지나 휴식 시간을 가지며 심적 여유를 찾았다고. 대신 최근 트렌드에 해당하는 빠른 호흡의 연기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공백기 동안 많이 놀았고 행복했어요. 그러다 이번에 작품을 하게 됐는데 좋은 드라마에서 재밌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맛을 느꼈어요. 피가 끓더라고요. 저는 예전엔 저만의 무기로만 경쟁했어요. 제가 잘하는 방식으로만 연기하려 했던거죠. 이번에는 새로운 역할이잖아요. 다 내려놓고 감독님에게 의지했어요. 습관이나 예전 방식의 화법을 버리려고 했죠. 호흡이 정말 짧아졌어요. 다행히 친절히 알려준 제작진 덕분에 사랑받는 것 같아요.”

김정은이 한창 활동하던 시대와 달리 최근 미디어 환경은 많이 바뀌었다. 촬영장 분위기도 점차 수평적으로 변했으며, 드라마를 시청하는 형태도 점점 달라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연기자에게 요구하는 것도 변화한다.

“요즘에는 휴대전화로 드라마를 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템포를 계속 빨리 가져갔어요. 친구들이 ‘지하철에서 다 너 드라마 보고 있어’라고 알려줘요. 드라마 보면서 실시간으로 댓들도 달더라고요. 모든 게 신기해요. 연기하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 ‘강남순’이 ‘도봉순’ 스핀오프잖아요. 개인적으로는 황금주 스핀오프도 생겨났으면 좋겠어요. 마치 마블 시리즈처럼 가지를 뻗어나가는 거죠.”

연기에 대한 열망이 커진 만큼 시선도 달라졌다. 되도록 많은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예전에는 드라마 주인공만 노렸지만, 이제는 어떤 작품과 역할을 상관하지 않고 달려들 계획이라고 한다.

“사실 저희는 선택받는 입장이잖아요. 기회가 썩 많지 않아요. ‘강남순’ 출연자 중에 저만 놀고 있어요. 조바심이 막 생겨요. 저예산 영화도 좋은 작품이라면 참여하고 싶어요. 저 ‘노 개런티’도 되게 좋아해요. ‘강남순’으로 제가 배우라는 걸 다시 깨달았어요. 살아있다는 걸 느껴요. 이번에 느낀 여러 행복한 순간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다시 열심히 할 거예요.”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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