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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가도

각 나라마다 멋진 관광루트가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가든 루트라는 이름의 여행코스가 있고, 호주엔 빅토리아 해변을 끼고 달리는 그레이트 오션 로드가 있다. 두브로브니크까지 어어지는 크로아티아의 해안도로는 신의 선물이라고 불린다. 독일에도 지역별 특색을 담은 테마형 가도가 많은데, 그 길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여행길이 된다.

그 중에서 자연경관의 아름다움과 함께 역사가 담긴 마을을 돌아보며 여행할 수 있는 로맨틱 가도가 유명하다. 독일 중남부를 관통하는 길이 약 400km의 이 루트는 원래 독일에서 이탈리아의 로마로 가기 위한 무역통로였다. 즉 로만(Roman) 가도였는데, 길가의 풍경과 인접한 도시의 분위기가 너무 낭만적이라서 20세기 중반부터 로맨틱(Romantic) 가도로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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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에서 남동쪽으로 100㎞ 정도 떨어진 와인의 도시 뷔르츠부르크가 낭만의 출발이다. 이곳에서 출발해 로맨틱가도의 꽃 로텐부르크, 중세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딩켈스ㅤㅂㅞㄹ,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의 모티브가 된 뇌르트링엔으로 이어진다. 그 끝은 알프스의 산기슭에 자리 잡은 퓌센이다. 바로 월드 디즈니의 백설공주성으로 유명한 노이슈반스타인 성이 있는 곳이다.

오스트리아 티롤에서 독일로 넘어간 우리 가족은 로맨틱 가도를 거슬러 올라갔다. 퓌센에서 출발해 뷔리츠부르크까지 북쪽으로 향했다. 이는 가족 여행의 시작점이자 종착역인 프랑스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그동안 파리의 에펠탑을 시작으로 몽생미셸 수도원, 세고비아의 수도교, 마드리드 왕궁과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물에 잠기고 있는 베네치아, 크로아티아의 해안절경, 스위스의 눈 덮인 알프스 등 세 달 동안 많은 길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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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 비해 로맨틱 가도는 거창하지 않다. 이름처럼 낭만적인 분위기이지만, 각 나라를 대표하는 거대한 문화유산과는 다른 느낌이다. 마을은 작고 아담하다. 한나절이면 돌아볼 수 있을 정도다. 마을 보다 가는 길이 더 낭만적이다. 길가의 오른 쪽부터 왼쪽 끝까지 초록의 풀들이 춤을 춘다. 그동안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보기 힘들 초록 바다의 물결이다.

소박하지만 정겨운 로맨틱 가도는 우리에게 여유를 선물했다. 거창한 건축물, 압도적인 자연미가 아닌 편안함을 안겨준다. 그 속에서 그동안 달려온 길을 정리하고 돌아보게 하는 여유를 로맨틱 가도에서 만난다. 첼로 음악을 벗 삼으며 달린 이 길에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일상으로 조금씩 돌아갈 준비를 한다.

세 달에 걸친 유럽 자동차 여행도 이제 마지막을 향한다. 로맨틱 가도를 타고 마지막 종착지인 프랑스 파리로 향한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해지기 위해 떠난 가족세계여행이었다. 로맨틱 가도의 차분하고 정갈한 풍경은 여행하는 동안 느낀 흥분과 즐거움, 아쉬움을 시나브로 갈무리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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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센

우리는 로맨틱 가도의 종점인 퓌센에서 출발했다. 독일에서 가장 봐야하는 곳으로 손꼽히는 그 유명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이곳에 있다. 오스트리아 티롤에서 퓌센까지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데, 내비게이션에 찍은 노이슈반스타인 성 주변에 다다르자 주차장이 P1, P2 이렇게 나타난다. 우리는 가장 끝에 있는 P5 주차장에 차를 파킹했다.

그 앞에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마리엔 다리까지 올라가는 셔틀버스가 있다. 왕복 티켓을 끊지 않고 원웨이 티켓을 구입했다. 마리엔 다리에서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거쳐 주차장까지는 숲속 내리막길이라 굳이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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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틀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오르자 마리엔 다리에 도착한다. 계곡 사이에 놓여있는 좁은 다리는 인파로 북적인다. 사람들은 차례차례 줄을 서서 다리를 지나간다. 대부분 기념 사진만 찍고 빠지는데, 기다리는 뒷사람을 위한 배려가 느껴진다. 우리 가족도 얼마 기다리지 않아 다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곳에서 노이슈반스타인 성이 푸른 바다의 백조처럼 고고하게 보인다. 월드디즈니를 통해 낯익은 모습이다. 현존하는 유럽의 고성 중에 가장 뛰어난 조형미를 뽐내는 이 성으로 매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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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을 만든 주인공은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는 15년에 걸친 난공사 끝에 1884년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완성한다. 당시 유명한 화가 크리스티안 앙크가 기본설계를 맡으며 예술미를 더했다. 루드비히 2세는 왕권시대가 몰락하고 민주적인 의회제도가 싹틀 무렵 왕좌에 오르며 꼭두각시 왕으로 전락했고, 허울뿐인 왕실의 허무함을 세계 최고의 성을 축조하는 것에 광적으로 매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성을 짓느라 왕실 부채가 급증했고, 정부와의 마찰도 증폭했다. 결국 루드비히 2세는 정신병자로 낙인찍히며 폐위된다. 그리고 미치광이 왕으로 전락한 그는 노이슈반스타인 성이 완공되고 3년 뒤, 슈타른베르크 호수에 빠져 익사체로 떠오르는 운명을 맞는다. 사인은 자살이지만, 여러 의문점이 남겨져 있다고 한다. 루드비히 2세는 노이슈반스타인 성이 관광지가 되는 걸 원치 않아 자신이 죽으면 부술 것을 당부했지만, 현재 독일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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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르트링엔

퓌센에서 노이슈판스타인 성을 본 우리는 벰딩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에 뇌르트링엔으로 차를 몰았다. 벰딩은 5000여 명이 거주하는 작은 도시로 작은 분지형태이다. 뇌르트링엔도 비슷한 형태인데, 1500만 년 전, 1km가 넘는 거대한 운석의 충돌에 의해 생긴 둥근 분지에 마을이 자리 잡았다.

이곳에는 중세 성곽이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도시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다. 독일에서 오늘날까지 성곽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곳은 뇌르트링엔을 포함해, 앞으로 가게 될 딩켈스뷜, 로텐부르크 등 딱 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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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뇌르트링엔의 성벽에 올라 한 바퀴를 돌았다. 장자크 게오르크 교회를 구심점으로 붉은 지붕이 다닥다닥 붙어 시가지를 이루고 있다. 그 모습이 영화 ‘윌리 웡카와 초콜렛 공장’의 마지막 장면으로 등장했고, 일본 만화 ‘진격의 거인’의 배경이 됐다. 성벽 위 좁은 길을 따라 걷다가 출발한 곳에 다시 도착하자 교회 종소리가 울린다. 1시간이 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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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켈스뷜

뇌르트링엔에서 ‘로맨틱 가도’라는 푯발이 붙어있는 도로를 자동차로 달리면 딩켈스뷜까지는 1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한다. 로맨틱 가도 주변에 중세의 도시들은 포도송이처럼 붙어있다. 딩켈스뷜은 ‘또 하나의 로텐부르크’로 불릴 만큼 닮은꼴이지만, 훨씬 더 조용하고 차분하다. 로텐부르크에 비해 찾는 사람은 적어도 매력은 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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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피할 수 있어 전형적인 중세 독일 마을의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집은 천연색으로 치장되어 있고, 간판 글씨도 로만 고딕체로 통일되어 있다. 고색창연한 딩켈스뷜에서 21세기 최첨단 시대에서 온 여행자는 순간적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온듯한 착각에 빠진다. 딩켈스뷜은 낭만로드의 숨은 보석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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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텐부르크

‘중세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로텐부르크는 로맨틱 가도의 꽃이다. 3.4km의 성곽에 둘러쌓인 로텐부르크의 중심은 마르크트 광장이다. 이곳에서 중세도시를 둘러싼 성곽까지는 걸어서 10분이 걸리지 않아, 도시 전체를 둘러보는데 한나절이면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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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르크트 광장 중앙에 있는 13세기 고딕양식의 시청사 첨탑에 올랐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올라갈 정도의 좁고 가파른 사다리를 타고 60m 높이의 종탑 꼭대기에 오르면, 붉은 삼각 지붕으로 빼곡한 로텐부르크가 품에 안길 듯 다가온다. 간간히 비가 흩뿌리는 날씨 때문인지 도시가 파스텔톤의 동화 속 풍경 같다.

로텐부르크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유적이며 박물관이다. 시청사 종탑에서 내려와 성 야곱 교회를 둘러보고 나서 알록달록한 로텐부르크 골목 사이를 걸어다니는데, 누군가 나를 부른다. 돌아보니 기념품점으로 보이는 곳에서 한 남성이 밝게 웃으며 손짓하고 있다. 나를 부르는게 맞냐고 하니 그렇다고 하며 가게로 들어오라고 한다. 표정이 해맑아 순순히 가게에 들어가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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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석 라면과 한국산 김, 그리고 여러 기념품이 보인다. 그는 일본 쿠마모토 출신으로 이곳에 둥지를 튼 지 꽤 되었다고 한다. 내가 쿠마모토에 가 본 적이 있다고 하자 쿠마모토 지진 이야기며 그곳이 걱정된다는 등 여러 이야기를 사심없이 풀어낸다. 일본 사람들이 로텐부르크에 많이 오냐고 물어보니 “지금(6월)부터 시즌”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말처럼 로맨틱 가도에서는 일본인 관광객이 압도적으로 많다. 도로에서 일본어로 쓰여진 표지판을 볼 수 있을 정도다. 일본과 독일 로텐부르크의 인연은 2차 세계대전이다. 당시 도시의 반 이상이 파괴 되었는데, 로덴부르크의 부서진 성곽을 복원하는데 일본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알려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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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르츠부르크

독일 로맨틱 가도의 출발지이지만, 우리 가족에겐 종점이 되는 뷔르츠부르크는 ‘독일의 프라하’로 불린다. 마인 강을 가로지르는 알테마인교는 프라하의 카를교를 연상시킨다. 강 위에 놓인 석조 다리의 형태와 그 위에 도드라지게 세워진 동상까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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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을 대표하는 작가 헤르만 헤세는 만약 고향을 선택할 수 있다면 “비르츠부르크”라고 말했다. 알테마인교 너머 산 위에는 마리엔베르크 요새가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 건너편에는 붉은 색의 마리엔 카펠과 노이뮌스터 성당, 성 킬리안 대성당, 신축 교회 등이 도시의 이정표처럼 높은 첨탑을 세우고 있다. 도시 주변은 이곳이 독일의 대표적인 와인산지라는 것을 증명하듯 온통 포도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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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인 강가의 숙소에 묵었다. 강변을 따라 길을 걸으며 자연스럽게 알테마인교에 닿는다. 그곳에선 많은 사람들이 와인 잔을 들고 담소를 나눈다. 나도 저녁 무렵 화이트 와인 한 잔을 마시며 그 분위기에 취해 본다. 건축물 중에는 마르크트 광장에 위치한 고딕 양식의 예배당인 마리엔 카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온통 붉은색으로 치장한 외관이다. 마리엔 카펠의 겉이 화려하다면 킬리안 광장의 뷔르츠부르크 대성당은 속이 수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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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한 겉모양만 보고 대성당이라고 부르기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자 흰색으로 마감된 벽면과 천장이 눈을 부시게 한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장식과 단순한 스테인글라스가 한 차원 높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트램이 다니는 번화가의 풍경은 오스트리아 그라츠와 무척 흡사하다.

이주화
배우 이주화는 지난 1년간 잠시 무대를 떠나 유럽을 비롯해 세계각지를 여행했다. 추억의 잔고를 가득채워 돌아온 뒤 최근 <인생통장 여행으로 채우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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