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SC_5209
마술사나 쓰는 모자, 영국 런던의 일상 풍경에서 만날 수 있다.
DSC_5209
활기찬 런던 거리.
DSC_5209
영국 런던 템즈 강변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가 높다.

[런던·브라이턴=글·사진 스포츠서울 이우석기자]듣던대로 정말 해가 잘 지지 않았다. 8월의 영국. 오후 9시 쯤 푸르스름한 밤이 몰려오기 직전까지 런던 트라팔가 광장은 새빨간 태양초처럼 볕을 쬐는 런더너들로 가득찼다. 유럽 각국에서 모여든 관광객은 일제히 펍으로 모이고 웨스트 엔드의 뮤지컬 극장 앞에는 긴 줄을 드리웠다.

DSC_5209
영국 런던.

미국과는 많이 다르고 유럽 다른 도시와 비교해도 낯설다. 건물은 죄다 ‘경희대’처럼 생겼고 길은 좁다. 새빨간 이층버스와 마차처럼 생긴 블랙캡(런던택시)이 미로같은 길을 질주한다. 인종 전시장 같은 거리를 걷는다. 낯설지만 좀 더 귀에 잘 들리는 영어 발음(‘T’가 들린다). 정말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마차를 끄는 마부도 있다. ‘마술사 모자’를 쓴 남자(그는 사실 호텔 도어맨이었다)도 봤다.

정말 오후엔 홍차와 스콘을 먹고 밤에는 커다란 에일 잔을 기울인다. 화장실을 쓰려면 적잖은 돈을 내야 하고 담배를 피우려면 하루치 용돈을 날릴 각오를 해야 한다.

DSC_5209
영국 런던.

런던에서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옥대입구’(옥스퍼드 카운티)에선 학교 앞 카페촌 대신 천년 역사에 이르는 중세 대학의 당당한 위용을 느낄 수 있다. 38개의 칼리지와 도서관, 크라이스트처치 등은 마침 방학을 맞아 영어캠프를 온 중국인 학생들로 북적인다. 그들은 옥스퍼드의 중국어 이름인 우진대학(牛津大學) 로고가 크게 새겨진 ‘학잠(학교점퍼)’을 입고 텅빈 캠퍼스를 누비고 있었다.

무려 십육년 만에 온, 21세기의 런던의 일상 풍경이다.

DSC_5209
영국 런던.
◇익사이팅한 런던 나이트

‘그들처럼’ 펍에 서서 에일을 마시고 싶었다. 막걸리처럼 걸죽한 에일 한 잔을 들고 담배를 피우며 소호 거리를 점령하고 있는 말쑥한 런더너들. 그게 아니라면 피카딜리 서커스의 어느 바에 들어가 여유있게 보드카 마티니를 젓지 말고 흔들어서(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 마셔보는 것도 괜찮겠다. 마치 ‘더브로세븐(007)’이라도 된 것처럼 굴어보거나. 그 정도 ‘코스프레’는 해야 비로소 영연방의 심장에 왔다는 것이 실감날 듯 했다.

DSC_5209
영국 런던 사우스뱅크센터 앞 펍 레스토랑은 여름밤을 즐기는 인파로 늘 북적인다.

런던에서 이같은 놀이를 할 곳은 정말 많다. 근대 이후 수많은 영화, 음악, 소설 등의 배경이었던 까닭이다. 애플스튜디오가 있던 애비로드(Abbey Road)에 가서 단순히 횡단보도를 한번 건너보는 것만으로도 꽤 훌륭한 여행의 추억을 남길 수 있다. 한낮 내내 수많은 ‘중국인 비틀스’가 길을 건너고 있다.

런던시청이 횡단보도의 신호를 없애고 보행자 우선으로 해놓았기 때문에 언제든 도전해 볼 수 있다. 마침 계절도 여름 배경이라 비슷하다.

DSC_6406-t
비틀즈의 앨범 재킷 중 가장 유명한 사진을 찍은 곳 애비로드. 이곳에는 늘 수많은 외국인 비틀즈 멤버(?)들이 길을 건너고 있다.

“왓슨, 베이커가 221B로 와주게” 늘 파이프를 물고 있었을 셜록 홈즈가 살았던 흡연 자취방(?)도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사실 택시에 두고 온 갤럭시노트2 등 의뢰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막상 문 앞에 접근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베이커가에 위치한 홈즈의 집 두꺼운 나무문 앞에는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중국인 왓슨(沃特森·워터선)단체와 꼬마 의뢰인들이 하루종일 진을 치고 있다. 이곳에는 셜록홈즈 박물관(코난 도일이 아니다)이 있다.

DSC_6406-t
소설 속 명탐정 셜록 홈즈가 살았던 곳으로 나오는 베이커가 2201B 역시 실존한다.

차를 타고 템즈강 강변북로(?)를 달리다보면 서쪽 강둑에 당당히 서 있는 녹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007이 내근일 때 출근하는 곳으로 유명한 영국 비밀정보부 MI6(M16이 아니다) 본사 건물이다. ‘비밀정보부’라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곳이다. 택시를 타고 “비밀정보부에 가자”고 하면 바로 데려다 준다.

이게 무슨 비밀정보부란 말인가. 낡은 폐공장 지하나 토굴 속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늘상 심야채널을 점령하고 ‘빤스’를 자세히 보여주는 빅토리아 시크릿이 절대 ‘비밀’스럽지 않은 것처럼 MI6 역시 지극히 ‘퍼블릭’한 인기 여행지다.

DSC_6406-t
가장 유명한 첩보원 007이 근무하는 곳으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MI6 본부. 이 기관은 실존한다.

냉전 시대 SIS란 이름으로 왕성히 활동했던 MI6은 군사 첩보기관이다. 1990년대 공식적으로 존재를 알린 이 기관은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로 유명세를 탔지만 사실 최첨단 기술과 현대와 복고의 복합양식으로 지은 본부 건물로도 유명하다.

DSC_6323
미국 LA 산타모니카와 닮은 브라이턴 피어
◇왕가의 휴양도시 브라이턴

사실 에딘버러나 리버풀을 가고 싶었지만 일정이 짧은 관계로 런던 남부 해안도시 브라이턴을 갔다. 차로 2시간 가량 달리면 닿는 곳이다. 과거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별장으로 개발된 해안 휴양도시. 우리로 따지면 ‘월미도’ 정도 되는데, 풍경은 미국 LA 산타모니카를 쏙 빼닮았다.

해변을 바라보는 언덕 아래 도로를 따라 늘어선 예쁜 컬러의 상점, 그리고 바다로 길게 뻗은 피어(Pier)까지 누가 베꼈을까 묻고 싶을 정도로 태평양과 영국해협에 면한 두 마을은 서로를 꼭 닮아 있다.

아무래도 18세기 중반에 생겨난 브라이턴이 먼저일 듯 하다. 조지 4세의 휴양지로 별궁을 짓자 귀족과 부자들도 앞다퉈 이곳으로 몰려왔다. 19세기 중반에는 런던 브릿지-브라이턴 간 철도도 놓였다.

햇볕이 그리운 영국인들이 이곳 몽돌해변에서 일광욕과 수영을 즐긴다. 역사를 자랑하는 브라이턴 피어는 놀이기구와 위락시설을 모아놓은 유원지처럼 흥겨워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들끓는다.

DSC_6355
왕가의 휴양지로 번성한 런던 남부 해안도시 브라이턴.

이곳에선 며칠씩 묵어가며 바다를 즐기기에 좋다. 해변가 호텔이나 언덕 위 민박(B&B)에 묵으며 딱 여름 한 계절 맑은 날씨를 자랑하는 영국의 아웃도어 라이프를 만끽할 수 있다. 해변가 식당에서 동화책에서 보던 애꾸눈 선장(직업은 모르겠지만 아마 뱃사람일 것이다)을 만났다. 정말 해적들이나 쓰는 시커먼 안대를 한 그는 대낮부터 커다란 맥주잔을 들고 지나가는 이들을 일일이 바라보고 있다. 굉장히 인상적인 곳이다.

우리나라도 해변까지 맛있는 생선구이집이 있듯 브라이턴에도 피시앤드칩스를 아주 잘하는 집이 있다. 코너에 위치한 뱅커스(Bankers)란 곳인데 작은 대구 한 마리를 통째로 튀겼다. 이 피시앤드칩스란 음식은 영국이 자랑하는 몇 안되는 전통 음식인데 사실 산업혁명 당시 사용자들이 노동자들의 점심 시간을 줄여보려고 고안한 음식이다.

DSC_6355
브라이턴에서 맛본 최고의 피시앤드칩스.

내연기관의 도입으로 북해 원양에서 트롤 조업이 가능해지자 값싼 흰살 생선이 대량으로 유입됐다. 방직공장을 돌리던 이것을 감자와 함께 한 솥에 튀겨내 급식을 하거나 길거리 노점에서 신문지 따위에 싸서 팔던 음식이 바로 피시앤드칩스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뱅커스의 대구 튀김은 소문대로 맛이 좋았다. 맥주와도 퍽 어울린다. 대신 방석만한 크기의 광어 스테이크는 닭에서 진화했는지 매우 뻑뻑하다. 근육을 키우는 사람들이 먹으면 딱 좋겠다.

DSC_6036
세븐시스터는 7개의 거대한 석회암 절벽으로 이뤄진 명소다.
◇영국의 땅끝 마을

브라이턴 인근에는 여고생 폭력서클과 비슷한 이름의 관광명소가 하나 있다. ‘세븐 시스터스’. 프랑스를 향해 난 영국해협에서 끝나는 석회암 절벽지대다. 해안선 위로 새하얀 절벽이 우람하게 서있다. 울퉁불퉁 근육질을 자랑하며 병풍처럼 막아선 이 7개의 절벽(사실 8개라고 한다)의 최고 높이는 해발 160m. 수직으로 잘리운 듯 아찔하게 섰다.

단면이 정말 빙벽처럼 새하얗다. 석회암 중에서도 이처럼 하얀 것은 처음 봤다. 석고로 만들었대도 믿을 지경이다. 하천과 바다가 만들어낸 해안단구다.

DSC_6036
세븐시스터는 7개의 거대한 석회암 절벽으로 이뤄진 명소다.

도립공원 격인 세븐 시스터스는 입구로부터 트레킹을 통해 오를 수 있다. 안내센터로부터 평평한 초지를 따라 걷다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완만한 언덕길로 올라 절벽 위로 곧장 가는 방법과 아래 해변을 보고난 후 급경사 오르막길을 따라 절벽을 가는 방법이다.

둘 중 어느 길을 선택한대도 그리 힘들진 않는다. 다만 처음부터 절벽 위를 올랐다 해변으로 내려오면 감동이 덜하다. 구성상 절정은 마지막 부분에 있어야 한다.

DSC_6036
세븐시스터는 7개의 거대한 석회암 절벽으로 이뤄진 명소다.

해변을 보고 급경사를 오르는 도중 크게 놀랐다. 아찔한 절벽 끝까지 아무런 안전펜스나 위험경고판이 없다는 것과 그래서 어떤 얼빠진 중년 사내 하나가 벼랑끝에 걸터 앉은 것을 봤기 때문이다. 단순히 인스타그램 용 포스팅을 위해 그는 벼랑에 엉덩이를 걸치고 두 발은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이런 간이 큰 짓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가 호주인이거나 그리스 주식에 전 재산을 투자한 사람인게 분명하다.

나는 제지하는 대신 사진으로 그의 마지막을 남겨야겠다는 신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예상과는 달리 그는 벌떡 일어나 낄낄대며 사라졌고 나도 궁금한 마음에 그 자리(근처)에 살금살금 다가가 봤다.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아찔하다. 때마침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와 간담이 서늘하다. 진공포장 양모이불처럼 쪼그라든 심장을 가지고 초록 언덕에 섰다.

DSC_6036
세븐시스터는 7개의 거대한 석회암 절벽으로 이뤄진 명소다.

드디어 ‘녹차가루를 뿌린 크림 케이크’ 위에 섰다. 많은 이들이 절벽 위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다. 시원한 바람과 파도소리, 그리고 바다내음. 저 푸른 영국해협(여기도 양국간 이름 문제로 분쟁이 있나?) 바다 너머로 프랑스가 있겠지. 영국 땅끝마을 세븐 시스터스는 실로 경이로운 풍경과 상징성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DSC_5306
코츠월드는 중세 영국 전원 마을의 역사와 전통이 오롯이 남아있는 곳이다. 사진의 알링턴 로는 양모 저장창고로서 훗날 미국의 헨리 포드가 탐냈던 건물이다.
◇영국 역사·전통 기행

영국 여행에서 전통을 빼놓을 수는 없다. 물론 런던에도 오랜 건물과 역사적 장소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영주와 소작인 등 ‘진짜 영국인’이 살았던 작은 시골 마을이 바로 코츠월드다. 15세기 영어로 ‘양의 언덕’이란 뜻의 코츠월드(Cotswold)는 영국인들의 은퇴 후 희망거주지로 인기가 높고, 일찍이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건물을 통째로 떼어 미국으로 가져가려고 했을 만큼 전통적인 매력을 오롯이 보존하고 있다.

수많은 중세 풍 돌집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작은 마을 하나가 아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가 만나는 지역에 위치한 코츠월드는 동서로 145㎞에 남북 40㎞의 거대한 지역이다. 대부분 양을 키워 양모를 채집하며 살던 목축 농가다.

DSC_5270
코츠월드에서도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바이버리 마을 풍경.

코츠월드의 약 50개 마을 중 바이버리(Bibury)는 특히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주 양동마을처럼 ‘지극히 영국적인 마을’로 통한다. 하천과 언덕으로 골목길을 거닐면 13∼15세기 영국 서민들이 살아가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히로히토 일왕이 왕자 시절 1920년 영국을 다녀갈 때 여기서 묵었다 해서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DSC_5306
여러 유럽 고도들이 그러하듯 런던 도심 역시 전통적인 요소가 깊이 배어있다.

세운지 400년이 넘은 스완호텔, 송어양식장 겸 레스토랑, 마너하우스(영주 저택), 양모창고 등이 세월을 잊고사는 듯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중 포드가 탐냈던 건물이 바로 양모창고인 ‘알링턴 로’다. 삐죽빼죽 솟은 지붕의 이 벽돌건물은 보기에도 근사하다. 주민들은 조상의 땀이 서린 낡은 돌건물을 미국의 자동차 부자가 미시건으로 가져가는 것을 원치 않았고, 결국 이곳 바이버리에 남을 수 있었다.

DSC_7219
여러 국가와 문화의 민주적인 정치이념을 새긴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800주년 기념 의자형태 조형물.

또 하나의 전통을 꼽자면 바로 ‘민주주의’의 역사다. 영국은 군주에게 “법대로 하자”며 문서(대헌장)에 사인을 받은 최초의 군주국가다. 대헌장(Magna Carta)은 올해로 딱 800년 됐다. 1215년 존 왕의 폭정에 대항해 귀족들이 런던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왕과 대결했다. 귀족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나부끼며 템스 강변의 러니미드에서 존 왕을 만나 양피지에 ‘칙허장’을 받았다.

특히 의회의 승인없이 과세할 수 없고 재판없이 사람을 처벌할 수 없다는 등의 조항은 각 국가의 근대헌법의 기초가 됐고, 그래서 대헌장을 민주주의, 법치주의의 최초 시원으로 삼는다.

DSC_5306
미국변호사협회가 감사의 의미로 기증한 대헌장 기념비.

대헌장이 승인된 곳은 그냥 넓은 축구장같은 벌판이다. 때마침 800주년을 기념해 세워놓은 의자 모양의 금속 조형물이 서 있는 것 이외엔 아무 것(흔한 기념식수도 없다)도 찾을 수 없다. 다만 미국변호사협회에서 ‘자신들의 일자리를 마련해준’ 대헌장을 기념해 작은 기념석조 건물을 지어놓았을 뿐이다.

이렇게 영국은 인류 역사 상 커다란 족적(침략과 약탈도 많이 했다)을 남긴 국가로서 의미있기 때문에 다양한 여행루트를 짤 수 있다. 비가 오는 겨울이 되기 전 영국을 갈 기회가 있다면 전통적 요소를 둘러보는 일정도 꽤 괜찮을 듯 하다.

demory@sportsseoul.com

기사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