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글·사진 | 대구=원성윤 기자] 여행이란 때로 낯선 풍경 속에서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고, 내면의 깊은 곳을 응시하는 과정이다.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히 나와 대화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최근 군위를 품으며 더욱 다채로운 매력을 지니게 된 대구광역시로 떠나보자. 목숨을 건 충절의 역사부터 세계적인 건축 거장들이 빚어낸 사색의 정원, 그리고 우리 문화유산의 정수를 온전히 담아낸 새로운 문화의 거점까지. 대구와 군위를 잇는 이 길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 묵직한 울림을 주는 ‘인생의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 600년의 비밀을 품은 충절, 엄흥도 묘와 육신사


최근 대구에서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왕사남)’의 흥행과 맞물려 단종과 사육신, 엄흥도 등 임금을 향한 충신들의 이야기를 엮은 대구시티투어 특별코스 ‘왕과 함께한 사람들’이 전석 조기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공식 투어 종료 후에도 개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 코스의 묵직한 방점을 찍는 곳이 바로 군위군 산성면에 자리한 충의공 엄흥도의 묘다.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삼족을 멸하겠다”는 세조의 서슬 퍼런 엄명 속에서도 영월 호장이었던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다. 이후 멸문지화를 피하고자 장남을 데리고 이곳 군위의 깊은 산골(군터골)로 숨어들었다. 대역죄인의 신분이었기에 살아생전은 물론, 죽어서도 무덤을 숨겨야 했다.


실제로 산을 오르면 묘역에 봉분이 여러 개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진짜 무덤을 숨기기 위한 눈속임이다. 무려 6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후손들은 묘사 때 가짜 봉분 앞에서 향을 피워 혼을 부른 뒤, 진짜 무덤 자리로 이동해 제를 올린다고 한다. 훗날 숙종과 영조 대에 이르러 충신 정려와 함께 부역·군역을 면제하는 국가 공식 문서인 ‘완문’이 이곳 군위 문중으로 내려오며 그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침묵으로 묘를 지켜낸 600년 가문의 역사가 고요한 산세 속에 짙게 배어있다.
단종을 향한 충절의 흔적은 대구 달성군의 ‘육신사’에서도 이어진다. 사육신으로 일컬어지는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의 위패를 모신 이곳은 원래 박팽년 선생만을 제사 지내던 곳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현손인 박계창이 사육신이 사당 문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는 애틋한 전설이 전해진다.
◇ “1000년의 풍경을 심다”… 철강 거인의 집념이 빚어낸 K-정원 ‘사유원’




이번 인생 여행의 한 축을 담당할 사색의 공간은 팔공산 자락에 숨겨진 비밀의 숲, ‘사유원’이다.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해 가는 곳’이라는 뜻처럼, 이곳은 단순한 수목원이 아니다.
사유원의 역사는 30년 전 한 철강 회사 오너의 뚝심에서 비롯됐다. 우연히 일본으로 반출되던 모과나무 네 그루를 구하기 위해 나선 그는,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의 훌륭한 모과나무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심은 나무들이 오늘날 수령 255년에서 최고 650년에 이르는 1089그루의 거대한 모과나무 군락으로 거듭났다. 대표 정원인 ‘풍설기천년(風雪記千年)’은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상처를 이겨내고 가을이면 노란 결실을 맺는 모과나무처럼, 이 공간이 1000년 동안 꿋꿋이 변치 않기를 바라는 설립자의 철학이 담겨 있다.





특히 사유원은 평지에 조성되는 유럽이나 중국의 정원과 달리, 대한민국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산지 지형을 있는 그대로 살려낸 ‘가장 한국적인 K-정원’을 표방한다. 여기에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 수상자 알바로 시자의 ‘소요헌’과 ‘소대’,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승효상의 ‘현암’과 ‘명정’ 등 국내외 유수 건축가들이 참여해 자연과 대립하지 않는 33점의 예술적 건축물을 절묘하게 배치했다.
사유원 박준용 본부장은 “사유원은 자연을 단순히 소유하는 곳이 아니라, 그 안에서 흐르는 시간을 오롯이 누리는 곳”이라며 “산지 정원 특유의 경사면을 따라 4시간가량 걷다 보면 어느새 피톤치드와 함께 내 안의 소리에 집중하는 온전한 사색의 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르세라핌 등 유명 아티스트들의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알려지며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사유원은 고요한 사색을 위해 하루 입장 인원을 350명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 간송의 담백한 그릇에 추사를 담다, 대구간송미술관


사유의 여정을 마무리할 최적의 장소는 10년간의 치밀한 준비 끝에 2024년 대구에 둥지를 튼 ‘대구간송미술관’이다. 전 재산을 바쳐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을 지켜낸 간송 전형필 선생의 ‘문화보국’ 정신이 깃든 곳이다. 인사동 쌈지길 등을 설계한 연세대 최문규 교수가 맡은 이 미술관은 산에서 도로로 내려오는 자연적인 언덕 지형을 깎지 않고 계단식으로 품어냈다. 화려함보다는 ‘간송의 소장품을 담는 담백한 그릇’을 표방하며 11개의 웅장한 나무 기둥과 자연을 들이는 통창으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
현재 상설전시실에서는 옛 선비들이 낚시를 하고 배를 타며 무더위를 달래던 풍경을 담은 ‘청량한 여름’ 전이 열리고 있다. 지류(종이) 중심의 고미술품 특성상 훼손을 막기 위해 1년에 세 번씩 작품을 전면 교체하기 때문에, 언제 방문하더라도 늘 새로운 조선의 명작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오는 5일까지 열리는 기획전시 ‘추사의 그림 수업’은 절대 놓쳐선 안 될 압도적 하이라이트다. 간송의 소장품은 물론 국립중앙박물관 등 타 기관의 대여까지 이끌어내어 전국에 흩어진 추사 김정희와 제자들의 그림을 역사상 최초로 한자리에 모았다. 서예와 그림이 하나의 종교적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 최고 걸작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를 비롯해, 19세기 화단이 쇠락하지만은 않았음을 증명하는 제자들의 화려한 회화 작품과 추사의 날카로운 비평까지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socool@sportsseoul.com
기사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