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작금의 대한민국은 헌정 질서를 유린하려 했던 거대한 폭력을 극복한 역사 위에 놓여 있다. 국민과의 약속인 법과 제도를 군화발로 짓밟고, 오직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폭주했던 탐욕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 사이 처참한 희생이 따랐고, 무자비한 국가 폭력의 상흔은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5.16’과 ‘12.12’, ‘5.18’은 권력의 잔혹한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 그 날의 역사다. 그리고 지난 2024년 12월 3일, 그 어두운 역사를 반복하려 했던 참담한 발악이 있었다.

국내 최고의 비주얼리스트 이명세 감독의 신작 시네마틱 다큐멘터리 ‘란 12.3’은 그날 밤, 더러운 권력 찬탈을 막아낸 우리 국민의 처절한 희생을 묵직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약 300명의 시민이 건넨 사연과 제보 영상, 그리고 방송사 자료화면을 이명세 감독만의 독보적인 감각으로 엮어냈다. 다큐멘터리에 흔히 등장하는 인터뷰 신은 단 한 컷도 없다.

한 컷에 다양한 의미를 꾹꾹 눌러 담는 이명세 감독의 영화라기엔 이례적으로 친절하다. 심야의 기습적인 계엄령 선포부터 그 이후 국회 안팎에서 벌어진 시민들의 분투가 순차적으로 정확하게 담겨 있다. IT가 고도로 발달한 21세기에 계엄이 가당키나 하겠냐는 모두의 의심을 비웃듯, 윤석열 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무모한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 광기를 막아낸 건 결국 국민이었다. 계엄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지체 없이 국회로 달려갔다. 무장한 군인과 경찰이 막아선 바리케이드를 맨몸으로 뚫어냈다. 누군가는 총구를 움켜쥐며 대들었고, 누군가는 “그러면 안 된다”며 엄마의 마음으로 군인들을 다독였다. 과거 “‘운동’ 좀 해봤다”는 국회 보좌진들은 본회의장을 철통같이 지켜내며 가구로 스크럼을 짰다. 총을 쏘면 기꺼이 맞겠다는 비장한 눈빛이 화면 곳곳에 서려 있다.

‘란 12.3’의 주인공은 결국 그날을 지킨 시민들이다. 영화는 시스템을 무력으로 마비시키려 했던 늑대들의 야만과 온몸으로 세상을 지켜낸 시민들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5.18’ 당시의 폭력과 현실의 폭력이 절묘하게 맞닿은 가운데 “난 5.18의 그 분들처럼 죽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절규는 심장을 때린다. 12.3의 승리는 한강 작가의 말처럼 과거가 현재를 살린 역사이기도 하다. 이미 결과까지 다 아는 기록임에도, 보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고 기어이 뜨거운 눈물을 끌어올린다.

놀라운 점은 서사의 흐름이다. 별다른 대사 없이 이미지 컷이 교차함에도 사운드와 음악이 시퀀스에 맞춰 절묘하게 변화하며 마치 12월 3일 국회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강렬한 체험을 선사한다. 그 와중에도 ‘대통령 김건ㅎ’, ‘박뿜ㄱ’, ‘이럴 줄 알았으면 막 살 걸 그랬어요 ㅆ’ 등 이명세 감독 특유의 블랙 코미디가 곳곳에 배치됐다. 무겁고 장엄하다가도 기막히게 힘을 쏙 빼는 밸런스가 압권이다. 거장의 모든 기술이 집약되어 지극히 세련되고 매혹적이다.

워낙 첨예한 사안인 탓에 첫 주 상영관 확보조차 쉽지 않아 관객들이 이른바 ‘영혼 보내기’로 화력을 더하고 있다. 하지만 영혼만 보내기엔, 극장에서 마주하는 시각적 쾌감과 감동이 너무도 압도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늑대 무리의 욕망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육신도 기꺼이 영화관으로 향해, 생생하게 그 날의 역사를 느껴야만 한다. 그래야 어두운 욕망과 또 맞설 수 있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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