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조선우 기자] 한국 경제가 지독한 ‘착시 현상’에 빠졌다. 반도체라는 거대한 엔진 하나만 뜨겁게 돌아갈 뿐, 뷰티·석유화학·배터리 등 나머지 주력 엔진들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 이른바 ‘반도체 편식’이 심화되면서 산업계 전반에 ‘K-자형’ 양극화의 그늘이 짙어지고 있다.
29일 산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AI(인공지능) 훈풍을 타고 역대급 실적 잔치를 벌이는 동안, 대한민국 수출을 떠받치던 다른 제조업 형님들은 ‘줄초상’을 치르고 있다.
◇ ‘황제주’의 추락…LG생건, 적자 쇼크

‘차석용 매직’으로 불리며 17년 연속 성장을 기록했던 LG생활건강은 뼈아픈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지난 28일 공시된 2025년 4분기 영업이익은 -727억 원. 전년 동기 대비 적자 전환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다. 매출 또한 1조 4728억 원으로 8.5% 뒷걸음질 쳤다. 중국 시장 부진과 대규모 구조조정 비용이 발목을 잡았다. ‘후’, ‘숨’ 등 럭셔리 브랜드의 리브랜딩을 시도하고 있지만, 돌아선 유커(중국 관광객)들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 “팔수록 손해”…롯데케미칼·삼성SDI의 비명

‘산업의 쌀’로 불리는 석유화학 업계의 겨울은 더 길다. 롯데케미칼은 중국발 공급 과잉이라는 구조적 악재에 갇혀 장기 침체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4분기 역시 대규모 적자가 확실시된다. 야심 차게 추진한 LCI(석유화학단지) 가동 초기 비용까지 겹치며 수익성이 곤두박질쳤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이 기초 소재를 자급자족하기 시작하면서 한국 석유화학의 황금기는 사실상 끝났다”는 비관론까지 내놓는다.
미래 먹거리라던 배터리(이차전지)도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의 벽에 부딪혔다. 삼성SDI는 전기차 시장 위축과 유럽·북미의 보조금 축소 정책 직격탄을 맞으며 영업손실을 기록할 전망이다. 기업 개별의 노력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글로벌 정책 변수라 위기감은 더 크다.
◇ 15개 중 9개가 ‘수출 마이너스’…“제조업 기초체력 바닥”
문제는 이런 부진이 특정 기업만의 이슈가 아니라는 점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15대 주력 수출 품목 중 석유화학, 이차전지, 철강 등 무려 9개 품목의 수출이 전년 대비 감소했다. 반도체와 자동차를 제외하면 사실상 ‘수출 한국’의 엔진이 멈춰 선 셈이다.
증시는 AI 열풍에 환호하지만, 공장 현장에서는 라인 가동 중단과 희망퇴직 공고가 나붙는 ‘온도차’가 극심하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호황에 취해 제조업 전반의 경쟁력 약화를 방치한다면, 반도체 사이클이 꺾이는 순간 한국 경제는 걷잡을 수 없는 추락을 겪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화려한 지표 뒤에 가려진 제조업의 ‘기초체력 고갈’을 직시하고 산업 다변화를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blessoo@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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