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대면 뭐든 탑 찍는 진정한 승부사, 홍진호
“예전엔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지금은 가족 생각이 먼저”

[스포츠서울 | 김현덕 기자] 홍진호는 지금 세계 포커 무대에서 가장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22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WSOP(월드 시리즈 오브 포커) ‘포커 명예의 전당 바운티’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하며 브레이슬릿을 거머쥐었다. 865명이 출전한 대회에서 1위에 올랐다. 상금 27만6067달러(약 3억6000만 원)와 함께 ‘꿈의 팔찌’를 품에 안았다.
매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WSOP는 전 세계 프로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말 그대로 포커 플레이어들의 ‘올림픽’이자 꿈의 무대다. 정상에 오른 순간 단순히 개인의 영광을 넘어 한국 포커의 역사를 새로 썼다.
최근 스포츠서울과 만난 홍진호는 당시를 떠올리며 “전 세계에서 모인 선수들 사이에서 이름이 불렸을 때, 20년 전 e스포츠 무대에서 우승했을 때와는 또 다른 전율이 밀려왔다”고 말했다.
포커에 도전한 건 단순한 취미나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2014년 KBS2 ‘출발 드림팀’ 촬영 중 부상으로 6개월간 방송 활동이 중단되면서 예기치 못한 공백기를 맞았다. 이 시기, 오랜 라이벌이자 e스포츠 동반자인 임요환이 포커 플레이어로 전향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부터 선수 포지션에 대한 갈망이 있었어요. 요환이 형을 보고 ‘나도 그 무대에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 국내 포커 환경은 열악했다.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도, 수준 높은 데이터 분석 환경도 없었다. 홍진호는 해외 대회 영상을 수십 번 반복 재생하며 ‘왜 이 순간, 이런 결정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파고들었다.
베팅 패턴을 프레임 단위로 분석했다. 직접 상황을 가정하며 대응 전략을 시뮬레이션했다. 1년간의 독학 끝에 출전한 첫 국제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두면서, 그는 심리전과 수 싸움이 교차하는 세계에 완전히 매료됐다.
“상황을 설계하고, 그 설계가 정확히 맞아떨어질 때의 쾌감은 다른 종목에선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죠.”

포커는 홍진호의 세 번째 무대다. 첫 번째 무대는 한국 e스포츠의 태동기였다. 2000년 iTV ‘게임월드 고수를 이겨라’로 처음 대중 앞에 선 그는 ‘폭풍저그’라는 별명과 함께 스타크래프트 초창기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됐다. 단순한 인기 선수가 아니라,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의 존재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선구자였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과 커리어는 이후 수많은 후배 선수들의 지향점이 됐다. 오늘날 세계적인 스타가 된 ‘페이커’ 같은 차세대 e스포츠 영웅들이 설 무대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10년간 정상급 선수로 활약하며 ‘임진록’이라 불린 라이벌전, 굵직한 국제 대회 우승 등 숱한 명승부를 남겼지만 그는 정점에서 스스로 은퇴를 결심했다.
“게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0년 넘게 한 세계에만 있었으니, 완전히 다른 분야에서 제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도전한 두 번째 무대는 방송이었다. 은퇴 후 잠시 e스포츠 현장을 떠나 있었던 그는 지인의 제안으로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팀 감독을 맡아 1년간 팀을 이끌었다. 이 경험은 승부의 세계를 떠나 있었던 감각을 되살리는 계기가 됐다.
그 무렵 tvN ‘더 지니어스’ 출연 제안이 들어왔다. 단순한 예능이 아니라, 심리전과 전략, 설득과 배신이 뒤엉키는 서바이벌 포맷이었다. 홍진호는 초대 시즌에서 우승하며 ‘전략가’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
동시에 한국 예능 시장에서 본격적인 ‘서바이벌 예능 시대’의 포문을 연 주역으로 평가받았다. 이후 그는 다양한 방송에서 경험과 직감을 결합한 플레이로 시청자들에게 ‘게임판 설계자’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승부의 세계에서 살다가, 전혀 다른 규칙과 판을 가진 방으로 발을 들이는 듯한 기분이었죠. 새로운 무대에서 제 무기를 시험해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최근 ‘피의 게임 시즌3’에서는 방송인 홍진호의 전략가 본능이 다시 빛났다. 합숙 생활과 휴대폰 압수, 제한된 정보 속에서 심리전을 펼치는 환경은 그에게도 쉽지 않았다.
빌런이 다수 포진한 판에서 그는 차분하게 수를 읽었다. 때로는 자신을 희생하는 듯한 플레이로 판을 유리하게 바꿨다. 결승 직행을 확정지은 장면은 포커 테이블 위에서의 집중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잘하는 사람이 매 순간 돋보이긴 어렵습니다. 중요한 건 버티는 겁니다. 끝까지 살아남아야 비로소 기회가 오는 법이죠.”

스타크래프트, 방송, 포커까지, 세 개의 전혀 다른 무대에서 매번 바닥부터 시작해 정상까지 오른 홍진호는 이제 인생의 네 번째 챕터를 열고 있다. 그 문 앞에는 결혼과 출산이라는 전혀 다른 무게가 놓였다.
예전의 홍진호는 ‘독기’와 ‘오기’로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승부의 세계를 헤쳐나갔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승부의 순간에도 머릿속 한편에는 가족의 얼굴이 겹친다.
“작년에 결혼했고, 딸이 태어난 지 이제 8~9개월 됐습니다. 예전엔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는데, 지금은 안전을 먼저 생각하게 돼요. 하고 싶은 일도, 잘하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커졌습니다.”
그렇다고 도전을 멈춘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정밀해지고, 의미는 더욱 분명해졌다. 그는 매번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했고 이번에도 예외는 없다.
“라스베이거스 메인 이벤트 우승이 제일 큽니다. 그걸 이루면 선수로서 은퇴해도 좋을 겁니다.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겐 힘든 말이겠지만, 저에겐 너무 당연한 겁니다. 도전이라고 생각했기에 지금까지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겨왔죠.”
홍진호의 시계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초침은 다음 정상으로 향하고 있으며, 그 발걸음은 과거보다 더 정교하게 설계돼 있다. 이제 그의 도전은 승부 이상의 가치와 함께 가족과 나누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khd9987@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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