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1626만명. 영화 ‘극한직업’(2019)을 관람한 관객 숫자다. 역대 한국영화 흥행 2위다. 방송 당시 시청률 1%를 찍었던 JTBC ‘멜로가 체질’(2019)은 누군가에겐 인생드라마로 꼽힌다. 1000만 영화와 마니아 드라마를 촬영하며 이병헌 감독의 위상이 달라졌다

‘극한직업’이 끝난 뒤 새 작품을 찾던 중 제작사에서 박지독 작가의 ‘닭강정’을 추천했다. 국내에서 웬만큼 재밌는 웹툰의 판권은 다 팔려나갔는데, ‘닭강정’은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던 때였다.

‘닭강정’은 이른바 ‘병맛’ 웹툰이다. 어느날 정체불명의 기계에 들어가 닭강정이 된 딸을 찾는 아버지와 인턴사원의 고군분투를 그렸다. 교과서적인 플롯도 없고, 상상력이 지나쳐 영상화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꼽힌다. 손대면 안 되는 작품인데, 이 감독은 ‘안 된다’고 하면서도 이상하게 다음 화를 클릭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닭강정’의 출발점이다.

이병헌 감독은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한 커피숍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제작사에서 건넨 일종의 낚시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왜 보고 있는 건가?’라고 하다가 계속 다음 화를 넘기는 날 보게 됐다.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극한직업’이 대박 난 후 ‘멜로가 체질’이 호평받은 뒤였다. 영화와 드라마 모두 인정받은 이병헌 감독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그 자신감이 도전에 대한 강박으로 이어졌다.

“돌이켜보면 ‘꼭 도전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어요. 아무도 못 할 것 같고, 나 역시도 힘들테지만 ‘닭강정’은 재미있을 것 같았죠. ‘멜로가 체질’도 돈을 꽤 많이 벌었거든요. 말도 안 되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아서 해보고 싶었어요.”

이내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웹툰 ‘닭강정’은 도무지 실사화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현실성도 부족하고, 그림체 때문에 논란이 일기도 했다.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건 오롯이 이감독의 몫이었다.

“저는 대사 쓰면서 혼자 연기를 해봐요. ‘큰일 났다’는 생각도 몇 번 했어요. 혼자 얼굴이 진짜로 빨개진 적도 있어요. ‘이걸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뇌가 마비됐었어요. 이미 배우들은 연습실을 잡고 춤 연습을 시작했어요. 멈출 수 없었어요. ‘왜 내가 이걸 좋아했는가?’를 되뇌면서, ‘누군가는 나처럼 이걸 좋아할 거야’라고 위안 삼았어요. 배우들 덕에 살았어요.”

류승룡과 안재홍은 국내에서 가장 웃기는 배우로 꼽힌다. 이병헌 감독의 페르소나기도 하다. 처음부터 류승룡과 안재홍을 염두에 두고 대본을 작성했다. 싱크로율도 일치한다. ‘닭강정’에는 웃음을 자극하는 장면이 많다. 류승룡과 안재홍의 개인기가 빛을 발했다.

“배우들과 생각보다 대화를 많이 안 했어요. 주문한 건 만화적이고 연극적인 연기였어요. 첫 촬영하면서 마음속으로 위안이 됐어요. 아마 배우들도 부끄러운 순간이 있었을 것이고, 용기가 필요했을 거예요. 어떤 장면에서는 마음이 조급해질 때가 있어요. 하지만 드러내진 않아요. 자존심도 상하고, 걱정을 일으키는 거니까. 가벼운 코미디 같지만, 연기하는 사람들은 매우 진지해요. 두 배우 덕분에 여기까지 왔어요.”

류승룡과 안재홍 외에도 캐스팅이 눈부시다. 김유정을 비롯해 정호연, 진영, 고창석, 조현재, 문상훈 등이 특별출연했다. 배우 허준석, 양현민, 유승목, 정승길처럼 ‘극한직업’과 ‘멜로가 체질’에서 나온 ‘이병헌 사단’이 대거 등장했다. 익숙함과 색다름이 고루 섞여 있다.

“저는 역할과 어울리는지를 먼저 살펴요. 무분별하게 친분으로 캐스팅하진 않아요. 다만 이상하게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보여주게 돼요. 김남희 씨나 김태훈 씨는 오랫동안 봐 왔어요.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김태훈 씨는 이전과는 다른 색다른 코미디를 보여줘서 만족이 커요.”

‘닭강정’은 한국 문화계의 색다른 시도다. 이 세계관에 스며든 시청자는 흥미를 느끼지만, 지나친 생경함에 도망칠 수도 있다. ‘극한직업’이라는 쉬운 길을 두고 굳이 돌아간 셈이다.

“‘극한직업’이 있어서 ‘닭강정’이 나왔죠. 그런 성과가 없었다면 이런 시도는 있을 수 없죠. 다만 ‘극한직업’에 매몰되진 않고 싶어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극한직업’은 뇌가 쉬었던 작품이었죠. 스태프나 배우가 모두 이해하고 있었어요. 제가 뭘 안 해도 쉽게 풀려요. ‘닭강정’은 고뇌의 연속이었어요. 성취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닭강정’ 같은 데이터가 쌓이면 저 역시 운신의 폭이 넓어지거든요. 앞으로 매몰되지 않고 계속 도전을 시도하려고요.”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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