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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가수 이승철’과 스포츠서울은 1985년 같은 해 태어났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도 서봤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는 점에서 둘은 닮아있다.
1985년 록밴드 부활의 보컬로 시작한 그의 가수 인생은 첫 팀의 이름처럼 ‘추락’과 ‘부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들 같으면 쉽지 않았을 여러 일을 딛고 “매 앨범이 컴백이자 부활”이었다며 ‘라이브 황제’, ‘보컬 신’으로 우뚝 섰다.
최근 발매한 12집 앨범 제목 ‘시간 참 빠르다’에 맞춰 이승철의 음악 인생을 그와 함께 시기별 ‘키워드’로 요약-정리해 보았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이승철은 불편한 질문이나 털어놓기 힘든 이야기에 맞닥뜨렸을 때도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95년 5집 ‘더 브릿지 오브 소닉’ 키워드는 ‘재기의 아이콘’-96년 ‘오늘도 난’이 수록된 5집을 내기 전 결혼을 했다. 그해 2월 KBS ‘빅쇼’를 통해 방송에 복귀했기 때문에 방송 재개 후 첫 앨범이기도 하다. 5집은 이승철에게 어떤 의미인가.생각해 보면 나는 앨범을 낼 때마다 재기 앨범이다. 그룹에서 나와 솔로로 나오면 솔로 재기 앨범, 대마초로 들어갔다 나온 뒤 재기 앨범, 결혼한 뒤 재기 앨범, 이혼 극복 이후 재기 앨범, 다 재기 앨범이다.(웃음)
5집부터 좀 더 대중에게 다가갔다. 이전까지 내 팬은 대중이 아니라 마니아 층이었다. 4집까지 내 팬이 마니아 100명이었다면 5집을 발표하며 마니아 절반이 떨어져나갔다. 그 자리는 대중 50명이 채웠다, 5집은 내 팬층이 바뀐 앨범이다. 5집부터 나를 대중가수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 같다. ‘국민 가수’ 이미지가 붙을랑 말랑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5집으로 잃은 것도 많았다는 의미로 해석되는데.앨범에 여러 색깔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앨범 수록곡은 장르가 다 다르다. 그게 당시에는 위험할 수도 있고, 잘못하면 앨범 색깔이 없어질 수도 있는 모험이었다. 가수로서 촌스러워질 수도 있고. 그간 쌓아온 이미지가 추락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앨범으로 나는 버라이어티한 공연이 가능한 가수가 됐다. 우리 나라에 조용필 빼고는 댄스, 발라드 등 여러 장르가 다되는 가수가 없었는데 그 길을 걷게 된, 내게는 하나의 분기점이 된 앨범이다.
◇99년 6집 ‘오직 너뿐인 나를’ 키워드는 ‘가수는 노래로 말한다’-97년에 개인적인 시련(이혼)을 겪는다.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이혼이었다. 대마초 등은 다 내 잘못인 반면 이혼은 가정을 꾸리다가 한 인간과 헤어진 일이었다. 여러 상황들에 가슴이 아팠다.
-이후 99년 6집 ‘오직 너뿐인 나를’로 다시 한번 ‘재기’를 노리는데.‘오직 너뿐인 나를’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되는 전형적인 미국식 팝발라드였다. 그 전까지 그런 형식의 곡은 가요계에 없었다. 미국에서 곡을 써왔다. 사실 앨범을 다 만들어놓고 믹싱까지 한 상태에서, 미국에서 한 친구가 가지고 온 곡을 들었는데 너무 좋았다. 그래서 그날 밤 가사를 쓰고, 반주를 넣어 3일 만에 완성해 타이틀곡으로 삼은 게 ‘오직 너뿐인 나를’이었다.
가수에게 위기를 헤쳐나가는 돌파구는 결국 새로운 음악이다. 어찌됐든 가수는 음악으로 말해야 하는 사람이다. 나에게 이런 가르침을 준 이는 개그맨 엄용수 형이다. 이혼을 하고 한창 술마시며 방황할 시기에 술집에서 우연히 엄용수 형을 만났다. 언론이 나와 전처 쪽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번갈아 받아 쓰며 ‘진흙탕 싸움’ 양상이 될 때였다. 용수 형이 ‘요즘 네 인터뷰 기사가 별로 보기 안좋더라. 가수는 결국 노래로 말해야 한다. 히트곡 하나 내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얘기하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가수를 하며 늘 새로운 시도를 해왔는데 그게 위기를 돌파하는 힘이 돼 왔다. ‘안녕이라고 말하지마’는 국내 최초의 반말 형식 가사였다. 3집 타이틀곡 ‘방황’은 뉴잭스윙 스타일로, 국내에서 거의 최초로 샘플링을 사용한 곡이었고, 4집 ‘색깔 속의 비밀’은 재즈 사운드를 구현하기 위해 뉴욕에서 녹음했다. 5집 ‘오늘도 난’은 새로운 댄스 퍼포먼스를 위해 미국에서 흑인 댄서들을 데려와 무대를 꾸몄다. 역시 새로운 시도였던 ‘오직 너 뿐인 나를’이 히트하며 나는 의도와 다른,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길이 열릴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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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부활 재결성 키워드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시작됐다’-2000년 영화 OST 말리꽃이 성공한 것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잠잠하던 차에 2002년 부활 8집 ‘네버엔딩 스토리’로 그야말로 ‘대박’을 내며 다시 ‘부활’하게 된다. 당시 40만장 가까운 앨범 판매량을 기록했다.
당시 내 녹음실 루이 스튜디오를 만들었는데 첫 작품으로 뭘 할까 고민했다. 마침 부활 15주년이 되는 해라 태원 형에게 “기념 앨범이나 냅시다”라고 요청했다. 처음엔 활동할 생각도 안했다. 앨범 낸지 두달이 됐는데 반응이 없더라. HOT가 한창 맹위를 떨칠 때였는데 우리 노래를 들은 라디오 PD들에게 “너무 음악이 오래됐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접으려 하는데 KBS에서 유재석과 송은이가 진행하던 ‘이유있는 밤’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연습 장면을 찍어갔다. 그게 시발점이 돼 엄청나게 터졌다. 부랴부랴 콘서트 일정도 잡고 열심히 활동했다.
-이승철은 다른 노래도 잘 부르지만 특히 김태원이 만든 노래를 누구보다 잘 소화한다는 평가도 있다.태원 형은 자기가 생각하는 음악적인 그림이 있다. 그걸 이해 못하고 멜로디, 가사 등으로만 해석하려 들면 태원 형이 만든 노래를 소화하는데 한계가 있다. 태원 형 작품을 잘 소화하려면 노래 실력도 당연히 중요하고, 오랜 경험도 필요하다. 분석해 보면 태원 형 노래는 가사의 앞뒤 말이 논리적으로 잘 맞지 않는다. 그런데 태원 형 노래는 논리를 떠나 영적인 어떤 요소가 있다. 그걸 생각해야 잘 부를 수 있는 노래다. 나와 태원 형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하실에서부터 함께 커왔다. 오래 서로를 겪어본 사람들끼리만 아는 느낌 같은 게 우리에겐 있다.
-여전히 부활 팬 중에서는 김태원과 이승철의 재결합을 바라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일부 부활 팬들은 나를 욕하는 것 같더라. 내가 부활을 배신했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현재 부활은 엄연히 보컬리스트가 있는 팀인데 내가 자꾸 거론된다면 그건 후배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더이상 내 이름이 부활에 언급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함께 30주년 기념 이벤트를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냥 이승철이 있었던 부활은 팬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두는 게 맞는 것 같다.
‘네버엔딩 스토리’가 나온지도 벌써 13년이 지났다. 당시 태원 형과 약간 오해가 생긴 부분도 있었지만 이미 모두 지난 일이다. 올해 초 어머님 모친상 때 태원형이 장례식장에 찾아왔다. 술 한잔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2004년 7집 음반 긴 하루 키워드는 ‘정상궤도’-부활과 결별한 후 주춤했지만 2004년 드라마 불새 OST ‘인연’이 히트한 뒤 7집 ‘긴 하루’로 화려하게 도약하게 된다.부활과 함께 네버엔딩 스토리 활동이 마무리될 무렵 나는 한 업체와 앨범 계약을 맺게 된다. 부활 멤버들이 함께 하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여러 사정이 생겼고, 내가 솔로로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부활과 계약을 맺을 줄 알았던 업체 측은 난색을 표했다. 그래서 내가 업체 측에 ‘긴 하루’를 들려주며 내가 솔로로 나서는 게 싫다면 계약을 해지해도 좋다고 말했다. 회사 측에서 이 노래를 듣더니 솔로로 나가자고 하더라. 내겐 ‘역전의 아이콘’ 같은 노래다. 그리고 이 앨범 이후 내 삶은 비로소 ‘정상 궤도’에 오른다. 그다음부터는 음악생활과 인생 모두 차분하고 안정적인 패턴을 이어오고 있다.
-‘긴 하루’로 가수 데뷔후 처음 TV 가요 프로그램 1위를 차지했다.내가 상복은 정말 없다. 처음 MBC에서지상파 방송 1위를 할때 야외 생방송이었는데 그날 하필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무대도 어수선한 상황에서 프로그램이 급하게 끝났다. 나도 내가 흘리는 게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그날, 프로그램을 마친 뒤 오토바이를 타고 기차역으로 이동해 전주로 갔던 기억이 난다. 전주 야외 공연이었는데 6000명의 팬이 우비를 입고, 비를 맞으며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2006년 이후 키워드 ‘행복의 시작’-2006년 8집 ‘리플렉션 오브 사운드’(소리쳐,하얀새,시계 등 수록) 이후부터 최근 12집 ‘시간 참 빠르다’를 낼 때 까지 큰 기복 없이 안정적인 길을 걸어오고 있는 것 같다.현재의 아내(박현정 씨)와 함께 살기 시작한 게 2006년 8집 때부터다. 그때부터 내 행복이 시작됐다. ‘결혼하기 전엔 수컷에 불과하고, 결혼을 해야 남자’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내 경우를 보면 맞는것 같다. 누군가의 아빠가 되고 가장이 된 것도 중요하고, 내 인생에서 조언자가 생긴 것도 소중하다. 사업을 오래한 아내가 실질적으로 회사를 관리하며 내가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준다. 나와 함께 하는 스태프가 공연팀까지 총 120여명 가량인데 이들을 모두 아내가 관리해 주니 너무 좋다.
-최근 각종 사회 공헌 활동을 많이 하는데, 가수의 사회 활동이 왜 중요한가.내가 사회적 행보를 하게 된 것도 아내 덕이다. 아주 오래전에도 이런 저런 홍보대사를 많이 했지만 솔직히 말해 그때는 ‘이미지 세탁’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이제는 아니다.
연예인이 버는 돈은 팬에게 받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활동하고, 어떻게 돈을 쓰는지 팬이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거다. 그래서 나는 연예인이 버는 돈의 환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건 팬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지석기자 monami153@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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