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철
가수 이승철이 스포츠서울 창간 30주년을 기념해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자신의 스튜디오 벽거울을 통해 립스틱으로 창간을 축하하는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가수 이승철’과 스포츠서울은 1985년 같은 해 태어났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도 서봤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는 점에서 둘은 닮아있다.

1985년 록밴드 부활의 보컬로 시작한 그의 가수 인생은 첫 팀의 이름처럼 ‘추락’과 ‘부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들 같으면 쉽지 않았을 여러 일을 딛고 “매 앨범이 컴백이자 부활”이었다며 ‘라이브 황제’, ‘보컬 신’으로 우뚝 섰다.

최근 발매한 12집 앨범 제목 ‘시간 참 빠르다’에 맞춰 이승철의 음악 인생을 그와 함께 시기별 ‘키워드’로 요약 및 정리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이승철은 불편한 질문이나 털어놓기 힘든 이야기에 맞닥뜨렸을 때도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1985년 가요계 데뷔, 키워드는 ‘핀치히터’-원래 동네 선배인 김태원이 이끌던 ‘디 엔드’라는 밴드의 보컬이 김종서였는데, 군대를 가게 됐고 그래서 보컬로 활동한 게 그룹 ‘부활’의 시작이었다. 그때 이야기를 들려달라.

첫 정규 앨범은 86년 10월에 나왔는데 85년부터 부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노래 한곡을 발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데뷔 때를 키워드로 꼽자면 ‘핀치 히터’가 될 것이다.

당시 부활 매니저에게 그룹이 건반 연주자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나는 밤무대 그룹사운드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팀 건반에게 내가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냐’고 부활 가입을 권유했다. 그때 부활은 군포에 있는 서울음반 연습실에서 연습했는데 거기에 내가 우리팀 건반을 데리고 갔다. 부활 리더 (김)태원 형은 원래 동네 선배라 잘 알았다. 이후 건반 연주자를 따라 부활 연습실에 다녔는데 하루는 부활 매니저가 내게 ‘주위에 노래 잘하는 친구 없냐’고 물었다. 생각해 보니 나보다 잘하는 애가 없더라.(웃음) 그러던 찰나 친구가 매니저에게 ‘형, 얘 노래하던 애예요’라고 추천해줬다. 노래를 불러 보라 해서 딥 퍼플의 ‘솔져 오브 포츈’을 불렀다.

그런데 부활 보컬이 되려면 마이크와 시스템 스피커를 사와야 한다고 했다. 엄마를 졸라서 장비들을 마련했다. 꽤 많은 돈이 들었다. 스피커만 당시 400만원 정도였다. ‘딴따라’ 한다고 하면 보통 반대하는 부모가 그때는 많았는데, 교육자 집안임에도 우리 부모님은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86년 부활 1집 시절, 키워드는 ‘엑소 부럽지 않은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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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1집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희야’ ‘비와 당신의 이야기’ 등 히트곡이 많았다. 당시 자료를 보면 앨범이 13만장 팔렸다는 기록이 있다.

90년대 후반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기까지 앨범이 실제로 얼마나 팔렸는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아무도 모른다. 오직 레코드사 사장만이 안다.(웃음) 몇 장 팔렸는지 나는 모른다. 부활 1집이 크게 히트한 것만은 맞다.

-부활은 비슷한 시기 활동한 시나위, 백두산보다 먼저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당시 이승철은 예쁘장한 외모로 ‘한국의 보이 조지’라고 불리기도 했다.

부활은 대중적인 록그룹이 등장한 첫 사례다. 상업적인 요소가 강했다. 예쁘장한 보컬, 김태원의 음악적 깊이가 어우러진 젊은 감각을 선보였다. 그때까지 록이라 하면 신중현, 김태화, 김현식을 떠올렸는데 우리가 세대 교체의 신호탄이었다. 그룹사운드가 아직 인기가 없을 때였는데 인기몰이를 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희야’의 인기가 엄청났다.

여성 취향의 곡이었다. 다른 팀이 헤비메탈의 강한 사운드를 강조할 때 우리는 록발라드로 가서 성공을 거뒀다.

-당시 인기가 어느 정도였나.

지금의 엑소 부럽지 않은 정도였다. 공연을 하면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던 시절이 아니니 예매처에서 표를 사야 했다. 서울에 40~50군데 예매처가 있었던 시절인데 지정 좌석제가 아니었다. 무조건 선착순 입장인데 공연 전날 소녀 팬 몇백명이 밤새 줄을 섰다. 리허설 하러 공연장에 가면 텐트를 치고, 이불 덮고 자는 수백명의 팬을 볼 수 있었다.

-지금도 이승철은 그룹사운드, 부활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다.

그룹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예전엔 소위 밴드 출신 가수가 통기타 가수에게 인사하면 밴드 선배들에게 혼났다. ‘밴드 보컬이 통기타 가수에게 인사를 해?’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내 계보는 신중현, 김태화, 김현식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들에 대한 존경심을 늘 갖고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 심사위원을 할 때도 그룹을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갔다. 이하늘이 힙합에 애정을 갖고 심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승철
가수 이승철이 스포츠서울 창간 30주년을 기념해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86년 부활 2집 키워드는 ’꿈의 대화‘, 부활은 이승철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부활 2집은 ’회상‘. ’슬픈 사슴‘ 등 명곡이 많았지만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진 못했다. 훗날 ‘실험성이 강한 명반’으로 평가받게 된다.

당시에는 망한 앨범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예술적인 작품이었다는 평가도 있더라. 그러나 대중적 실패를 한 것은 분명하다. 대중적으로 볼 때 영화는 관객수, 드라마는 시청률, 가수는 음반 판매량으로 평가받는 게 당연하고, 그런 면에서 실패한 게 맞다.

그러나 2집을 만들 때 우리는 너무 좋았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음악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 2집 시절의 키워드를 ‘꿈의 대화’라 하고 싶다. 우리가 꿈꿨던 음악, 우리가 생각하던 그룹 사운드의 모습을 재현했다. 확실한 타이틀 곡이 없었던 건 아쉽다.

-부활 해체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러 말이 많다. 김태원과의 불화설은 여러 차례 해명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나온다.

기본적으로 부활이 해체한 것은 매니저 때문이었다. 팀이 받아야 할 돈을 몰래 가로채다 걸리는 등 금전적인 문제가 많았다. 그 때문에 그룹을 유지하기 힘들었고, 헤어지자고 합의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대신 고등학교에서 은퇴 공연도 했다. 원래 부활이라는 이름은 태원형, 나, 매니저 셋이 합의하에 누구도 쓰지 않기로 했는데, 나중에 둘이 찾아와서 쓰게 해달라고 내게 허락해 달라고 했다. 둘이 잘됐으면 좋겠으니 부활이라는 이름을 쓰라고 얘기했다.

-부활 시절을 전체적으로 돌아보면 어떤 때였나.

부활이 굉장히 오래 활동한 것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1년 6개월 뿐이었다. 그냥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이 벌어진 그룹이었다. 나오자 마자 히트했지만 여러 사건 때문에 팀 해체의 위기를 겪고, 2집을 내고 헤어졌다. 내가 잘되고 태원 형도 잘됐기 때문에 부활이 재조명받아서 잘됐던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실 굉장히 어려운 시절이었다. 부활 활동으로 멤버들은 단 10원도 못 벌었다. 차도, 돈도 없었다. 부산 공연에 가면 개런티를 회 한접시로 받던 시절이었다. 마치 영화인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듯 우리는 음악을 하면 배고픈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리가 밤무대라도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을 벌어야 악기도 사고, 앨범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계속 설득하니 태원 형도 결국 좋다고 했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돈 버는 건 좋은데 밤무대에서 자기가 기타를 칠 때 아무도 스테이지에서 블루스를 추면 안된다고 하더라. 그건 결국 밤무대에 나가지 말자는 말 아닌가.(웃음) 멤버들끼리 그렇게 인생의 목표가 차츰 달라지고, 여러 다른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할 무렵 매니저로 인한 금전적 문제가 생기며 멤버들이 해체를 결심하게 됐다.

-부활 시절을 한 키워드로 꼽자면.

내가 음악을 할 수 있게 한 어머니같은 존재다. 가족끼리는 원래 애증이 있다.(웃음)

이지석기자 monami153@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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