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원 소비 1차원적 구조 탈피…‘공동 창작’ 통한 2차 수익화 본격화
수면 아래 ‘구보(Catalog)’ 역주행…기획사 A&R 전략의 근본적 수정
단순 바이럴 채널 넘어 글로벌 음악 시장 ‘수익 창출 허브’로 진화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말도 안 돼… 사실 며칠 전까지 우울했는데, 나랑 개그 코드 맞는 로제님 하나로 희망을 봤어요.”
한 틱톡 크리에이터(끼미원)가 블랙핑크 신곡 리듬에 맞춰 재미 삼아 만든 ‘가상 안무’ 영상에 원작자인 로제가 직접 해당 안무를 따라 한 화답 영상을 올렸다. 결과는 폭발적이었다. 팬이 만든 원본 영상은 400만 회, 로제의 화답 영상은 1890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는 단순한 훈훈한 팬 서비스 미담이 아니다. 수천만 명의 시청 데이터가 곧바로 음원 스트리밍으로 직결되는, ‘팬 주도형 2차 창작’이 거대한 자본과 산업을 움직이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숏폼(Short-form)이 음악 산업의 유통 구조와 수익 모델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 소비자를 ‘공동 창작자’로…0원의 마케팅비가 만든 ‘메가 히트’

과거 음악 산업에서 팬들의 역할은 음반을 사고 스트리밍 순위를 올리는 수동적 소비자에 머물렀다. 하지만 숏폼 생태계에서는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기존 음원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공동 창작자’가 된다. 이렇게 탄생한 2차 창작물은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원본 IP의 가치를 기하급수적으로 끌어올린다.
산업적 측면에서 가장 주목받는 현상은 이른바 ‘구보(Catalog·과거 발매 음원)’의 경제적 재발견이다. 인디 밴드 위아더나잇이 10년 전 발매한 ‘티라미수 케익’은 숏폼 내에서 애니메이션 댄스 챌린지와 “T라 미숙해”라는 언어유희 밈(Meme)으로 결합하며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약 300만 건의 관련 영상이 제작됐고, 이 곡은 2024년 여름을 대표하는 메가 히트곡으로 부활했다.
이효리의 ‘텐 미닛’(2003년 발매)나 도이치(Doechii)의 ‘앵자이어티(Anxiety)’ 데모 음원(2019년)의 역주행도 궤를 같이한다. 기획사 입장에서는 막대한 추가 마케팅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묻혀있던 과거의 IP를 수익화할 수 있는 강력한 캐시카우 채널을 확보하게 된 셈이다.
◇ 음악 산업의 문법을 바꾼 숏폼…기획(A&R)부터 마케팅까지 전면 개편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글로벌 음악 산업의 밸류체인(가치사슬)도 숏폼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실제로 2025년 빌보드 ‘Hot 100’ 차트 1위 곡 10개 중 8개가 숏폼 플랫폼에서 먼저 바이럴 된 후 차트에 진입했다. 국제음반산업협회(IFPI) 조사에 따르면 16~24세 응답자의 82%가 음악을 접하는 주요 경로로 숏폼을 꼽았다.
기획사의 신인 발굴 및 음반 기획을 총괄하는 A&R(Artists and Repertoire) 부서의 핵심 업무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곡의 완성도와 대중성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기획 단계부터 숏폼 생태계에서의 ‘놀이성’과 ‘참여 가능성’을 정밀하게 설계한다. 신곡의 핵심 구간(킬링 파트)의 길이를 숏폼 트렌드에 맞게 조율하거나, 마크의 ‘1999’ 챌린지처럼 변형 가능한 안무의 여백을 의도적으로 남겨두는 식이다.
◇ 플랫폼 종속을 넘어선 ‘독자적 산업 생태계’의 구축

단순한 홍보 채널로 여겨졌던 숏폼 플랫폼들은 이제 자체적인 음악 데이터 분석 도구를 제공하며 산업의 중추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 팬들의 창작물을 공식 프로필에 고정하거나 실시간 음원 사용 데이터를 레이블에 제공함으로써, 기획사가 다음 비즈니스 모델을 신속하게 수립할 수 있도록 돕는다.
엔하이픈의 ‘‘더 신 : 배니시(THE SIN : VANISH)’, 방탄소년단의 ‘아리랑(ARIRANG)’ 사례처럼, 숏폼에서 촉발된 관심은 음원 플랫폼, OTT, 글로벌 팬덤 플랫폼으로 매끄럽게 이어지며 하나의 거대한 ‘통합 IP 유통 허브’를 형성하고 있다.
틱톡 관계자는 “틱톡은 그중에서도 음악 발견과 팬 참여가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플랫폼 중 하나로, 아티스트와 레이블이 팬덤의 반응을 빠르게 읽고 다음 콘텐츠 전략으로 연결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라며 “좋은 음악은 여전히 출발점이다. 하지만 이젠 그 음악이 팬덤 안에서 발견되고 재해석돼 확산되는 과정을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새로운 성공 공식으로 떠올랐다”라고 강조했다.
한 가요계 산업 관계자는 “이제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은 기본이고, 그 음악이 숏폼이라는 거대한 테스트베드 안에서 유저들에 의해 어떻게 쪼개지고 융합되어 확산될지를 기획하는 고도의 ‘IP 전략’이 필수적인 시대”라며 “플랫폼 안에서 노는 팬덤의 트래픽이 곧바로 조 단위의 산업적 수익으로 환산되는 지각변동이 이미 시작됐다”고 분석했다. gioi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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