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흔히 말하는 ‘짠 내’가 이런 것일까. 썩 좋은 점도 없고, 좋을 것도 없는 아저씨에게 측은지심이 강력히 밀려온다. 서울에 집 있는 대기업 부장에, 자존심 때문에 멀쩡한 가방이 있어도 명품 가방을 척척 사는 이른바 성공한 사람인 데다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위대하다고 말하는 ‘꼰대’에 불과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서글퍼진다.
땀나게 발로 뛰고 현란한 말로 관계자들을 품어 IT 기업 부장까지는 달려갔다. 하지만 관리직은 다르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것밖에 몰라 후배 마음 사로잡는 법엔 어둡다. 뛰어나게 일 처리 하는 경쟁 부서 후배 부장을 시기하기 바쁘고, 눈치 없는 행동을 반복한 탓에 오랫동안 극진히 모셔 온 상무의 의리도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고, 위기다. JTBC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는 김 부장 이야기’(이하 ‘김 부장)’의 김낙수(류승룡 분) 부장의 이야기다.

불운도 이어진다. 안 되려고 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 계약을 따내는 골프 접대 자리에서 홀인원을 친 행운은 공정거래위원회 직원에게 걸려 불행으로 이어진다. 백정태(유승목 분) 상무의 의중에 따라 무리하게 추진한 프로젝트는 IT 유튜버에게 걸려 혼쭐이 난다.
생존엔 방도가 없다. 무릎 꿇고 사죄해 결국 일을 처리해 오는 것으로 수습하다 못해, 영업실적을 위해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발에 땀을 흘린다. 일이 잘되는 건 꼭 마음 불편하게 오랜 친구의 생존을 건드린다. 커다란 실적을 갖고 오고도 돌아오는 건 인사 이동, 좌천이다.
회사에서 받지 못한 인정을 꼭 가족에게서 채우려고 하는 모습은 답답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혹시나 남편이 회사에서 밀려날까 하는 마음에 일 자리를 알아보는 아내(명세빈 분)에게 “제발 일 하지마. 쉬어. 나 못 믿어?”라고 내는 짜증은 가정의 화를 키운다. 변변한 대기업 회사에서 건실하게 스펙을 쌓길 바라는 아들(차강윤 분)을 향한 아비의 마음은, 너무 독단적이라 외면당한다.
눈치 살살 보며 가장을 피해 자기 방에 들어가는 가족을 뒤로하고 쓸쓸히 소주를 들이켜는 모습에선 괜한 죄책감도 생긴다. 내 자식 졸업식 대신 선배 자식 졸업식을 찾으며 견뎌온 자리가 남긴 대가이기도 하다.

국내에서 코미디 연기는 최고라 자부할 만한 류승룡이 ‘짠 내’의 결정체다. 김낙수는 인간적인 매력이 없다. 타인을 위하기보단 자신을 드러내기 바쁘다. 어렸을 때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자란 어린아이의 생떼가 50세가 넘어서도 존재한다. 속이 터지는 대사를 연이어 내뱉는데도 김 부장이 꼭 밉지 않은 건 류승룡의 매력 덕분이다.
연극적인 연기는 물론 서민적인 연기도 출중한 류승룡은 김낙수를 온몸에 갈아 넣은 듯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별다른 연기 없이 소주잔을 들이켜고, 씁쓸한 미소를 남기고, 후배들을 애써 독려하는 얼굴로 짙은 페이소스를 남긴다. 어떻게든 부끄럽지 않으려 억지 웃음을 띄우는 김낙수의 얼굴에, 오히려 시청자들의 마음이 뭉클해진다.

이것이 바로 류승룡이 지향하는 ‘코미디 연기’의 정수다. 본인은 울고 있는데 보는 사람은 웃고, 또 본인은 웃는데 보는 사람은 눈물이 나는 지점이다. 이 비애 속에서 중년의 ‘고독과 연대’가 형성된다. 생존을 향한 간절함 덕에, 전에 경험한 적 없는 미묘한 감정이 흐른다.
요플레 두 개 챙긴다고 능멸당하고, 자신 없는 사무실의 분위는 더 좋아지며 의지할 데라곤 누렁이뿐이지만, 그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오길 바라게 된다. 배우의 힘은 부정도 긍정으로 돌려놓는다. 아마도 성장하는 배우가 아닌 ‘성숙한 배우’가 되길 염원했던 배우 류승룡의 소망이 김낙수의 얼굴을 통해 완성됐기 때문 아닐까.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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