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에 휩싸여 엄마도 버리고, 딸도 버리고, 사랑도 버린다? MBC 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 속 연민정이 최근 화제의 인물로 급부상하고 있다. 연일 안방극장 시청자들의 화를 돋우는 그의 행보는, 이상하게도 시선을 뗄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다. 독해서 더 보고 싶은, 자꾸만 더 눈길이 가는 이 '악녀'. 그렇다면 우리나라 드라마 속에는 또 어떤 악녀들이 있을까?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악녀들의 계보를 살펴봤다.



심은하. 출처 | SBS


◇ '청춘의 덫' 이윤희, "다 부숴버릴 거야"
대한민국 드라마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악녀다. 1999년 드라마 '청춘의 덫'을 통해 심은하는 기존의 청순한 이미지를 버리고 새로운 악녀의 모습으로 완벽한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그는 극중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남자친구와의 사이에 둔 딸까지 잃어 복수를 결심하는 악녀 '이윤희'로 분한다. 이윤희의 "다 부숴버릴 거야"라는 대사가 인상적인 '청춘의 덫'은 2009년 AGB닐슨미디어리서치가 조사한 '악녀가 주인공인 드라마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작품' 1위로 꼽히기도 했다.



도지원. 출처 | SBS


◇ "뭬야?" 유행어 남긴 '여인천하' 경빈
2000년대, 두드러지는 사극 속 악녀가 있다. 바로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유행어 "뭬야"를 가진 조선시대 경빈이다. 경빈이 등장한 사극 '여인천하'에는 사실 경빈과 비등할 정도로 무서운 악녀들이 다수 등장했지만 도지원이 연기한 '경빈'은 출연시기가 연장했을 정도로 인기 높은 악역이었다. 그만큼 시청자들의 질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캐릭터인 것이다. 사약을 먹고 죽는 경빈의 말로에 사람들은 아쉬움과 동시에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김지수. 출처 | KBS 2TV


◇ 복수 당하는 악녀, 시청자 울린 '신도영'
2000년대에 들어서 악녀는 사실 다소 정형화된 부분이 없잖아 있다. 드라마 '진실', '이브의 모든 것' 등을 통해 등장한 악녀들은 대개 청순가련형 여주인공과 맞서 악랄한 모습이 강조돼 왔다. 그러나 2008년 드라마 '태양의 여자'를 통해 악녀들은 새로운 위치에 서게 된다. 바로 악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처지가 전면적으로 재조명된 것이다. 사실 이전까지 악녀들은 복수를 하는 주체거나, 여주인공이 복수를 하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주체가 된 경우 착한 여주인공을 극한까지 몰아가는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고 이는 '청춘의 덫'부터 시작해 '인어 아가씨', 막장의 정점을 찍었던 '아내의 유혹'까지 시청자들에게 '복수'의 히로인-악녀라는 공식을 만들었다. 여주인공을 복수하게 만드는 부수적 존재의 경우 악랄한 이미지만이 강조돼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태양의 여자' 속 신도영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신도영은 그저 어린 시절부터 불쌍했다. 입양이 됐지만 자신을 예뻐하던 엄마는 친딸이 생긴 이후로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다. 엄마의 눈에 띄는 차별은 신도영을 악녀로 만들었고, 그 과정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신도영이라는 캐릭터 자체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착한 동생에게 복수를 당하는 '악녀', 김지수의 연기가 빛났던 '태양의 여자'는 악녀의 입장에서 새롭게 드라마를 보게 만들었다.



신은경. 출처 | MBC


◇ '연륜'있는 악녀…마지막까지 욕망의 끈을 놓지 못해
욕망은 사람을 어디까지 치닫게 만드는 걸까. 드라마 '욕망의 불꽃' 속에서 태생적으로 가난한 윤나영은 부자에 대한 동경심이 가득하다. 그는 재벌가 며느리가 되기 위해 자신의 언니까지 누르며 쉼 없이 달려왔고, 하나뿐인 아들을 지키기 위해 광적인 집착을 보인다. 자동차로 사람을 치는 것까지 거리낌 없이 해낸 그는 욕망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사랑을 잃었지만 결국 욕망을 놓지 않아 남편의 사랑과 아들과 딸을 모두 얻게 됐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가진 것이 많아진 이 악녀는 드라마의 마지막까지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며, 요사스러운 미소로 시청자를 홀렸다. 윤나영으로 분한 신은경이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보여준 치열한 싸움은 드라마의 마지막까지 시청자들의 기를 쏙 빼놓았으며, 당당하다 못해 오만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던 그의 캐릭터는 여성 시청자들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수애. 출처 | SBS


◇ 독한 여자, 주다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여기 독한 여자가 있다. 자신의 뒷바라지를 한 남자친구를 버리고, 좀 더 높은 성공을 위해 재벌 2세를 잡는, 그러나 그 재벌 2세까지 버리고 끝없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올라서는 악녀가 있다. 결국에는 영부인의 자리까지 오른 그의 종말은 '권선징악'이라는 틀 아래 허무하게 끝났지만, 드라마가 방송되는 내내 사람들의 입에서는 "주다해, 망해라"라는 말이 끊이질 않았다. 그만큼 악녀 주다해는 견고했으며, 시청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유리. 출처 | MBC



◇ 대한민국 '완전체' 악녀 연민정
이 시대 최고의 핫이슈다. 시청률 33%(닐슨 코리아 기준)를 넘어서며 명실공이 주말극 최강자로 떠오른 '왔다! 장보리' 속 연민정은 보는 사람이 화가 날 정도의 악녀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연민정은 지금까지 쌓여온 한국 드라마의 악녀들을 종합해 놓은 완전체이기도 하다.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는 그의 모습은 '욕망의 불꽃' 속 윤나영을 닮았고, 그의 어린 시절 환경은 신도영에 가까우며, 악독한 짓을 하는 모습은 주다해랑 비슷하다. 팽팽한 기싸움에서는 경빈 못지않은 힘을 보이고, 청순한 이미지의 반전에서 나오는 매력은 심은하 부럽지않다. 악녀들의 가장 극한 모습만을 빼내 만들어진 완전체 연민정은 그렇기 때문에 욕을 먹고, 그렇기 때문에 눈을 뗄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그러나 그런 완전체의 모습으로 빚어냈기 때문인지 연민정에게는 '인간미'가 없다. 이제까지의 악녀들은 단 1%라도 인간미가 존재했다. '욕망의 덫' 이윤희는 악녀가 돼 복수를 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 있었고, 경빈 또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정치게임에서 승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했을 뿐이다. 신도영은 단지 엄마의 사랑이 고팠던 아이였으며, 윤나영은 '가족'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주다해 또한 자신의 딸이 죽을 때는 1%의 온정을 보였으나 연민정에게는 그 모든 것이 결여돼 있다. 때문에 "재희 씨를 사랑한다"는 연민정의 고백에서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돈'밖에 남지 않은 연민정.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왔다! 장보리' 속 그의 최후가 궁금해진다. 

황긍지 인턴기자 pride@sportsseoul.com



기사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