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센
LA다저스 마무리 투수 켄리 얀센(왼쪽)이 15일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시카고 컵스전에서 고의 보크를 범한 뒤 2루 주자에게 3루로 가라는 시그널을 주고 있다. 출처=MLB닷컴 중계화면 캡처

[스포츠서울 장강훈기자] 1988년 10월 25일 당시 한국화장품 소속이던 강기웅(현 삼성코치)은 제일은행전에서 히트 포 더 사이클(사이클링히트)에 3루타 한 개만을 남겨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지막 타석에서 홈런을 쏘아 올렸고, 진기록 수립을 위해 홈을 밟지 않는 ‘고의 누의 공과’를 단행했다.

누의 공과는 상대팀 어필이 있어야만 적용되는 규정인데, 제일은행측이 ‘괴씸죄’를 적용해 어필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심판진도 규정을 적용하지 않아 대기록 작성에 실패했다. 야구에서 고의 누의 공과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고의 보크는 얘기가 다르다. 어필플레이도 아닌데다 주자에게 공짜 진루를 허용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보크를 범할 이유가 거의 없다.

지난 15일(한국시간)에 LA다저스 마무리 투수 켄리 얀센(32)이 거짓말 같은 고의 보크로 8연속시즌 20세이브 기록을 달성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MLB닷컴)는 16일(한국시간) “고의 보크를 본적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상황은 이랬다. 지난 15일 다저스타디움에서 시카고 컵스를 만난 다저스는 8회말까지 5-3으로 리드했다. 수순대로 얀센이 마운드에 올랐고 1사 후 제이슨 헤이어워드가 수비 실책으로 2루에 도착했다. 쉼호흡을 한 얀센은 데이비드 보트를 삼진으로 돌려보내고 2아웃을 잡아냈다.

타석에 빅터 카라타니가 들어서자 얀센이 돌발 행동을 했다. 세트포지션으로 투구 동작에 들어간 얀센은 오른발을 마운드 위에서 구르는 이상한 행동으로 보크를 범했다. 심판진이 보크를 선언하기도 전에, 얀센 스스로 헤어워드에게 3루로 가라는 지시를 하기도 헸다. 눈길을 끄는 장면은 보크를 범하기 전에 야수들에게 ‘보크할 것’이라는 사인을 보낸점이다. MLB닷컴은 “2루 주자 헤어워드가 타자에게 사인을 전달하는 행위를 사전에 막았다’고 분석했다.

2사 3루 위기였지만 얀센은 카라타니를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8연속시즌 20세이브째를 수확했다.

얀센은 16일 오렌지카운티 레지스터 등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스프링캠프 때부터 이런 작전을 구상했지만 계속 잊어버려 사용하지 못했다. 이날 경기는 밥 게런 벤치코치의 아이디어로 실행에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017년 월드시리즈에서 다르빗슈 유가 뭇매를 맞을 때에도 다저스는 컵스가 투구습관을 활용한 것 외에도 주자와 타자간 사인플레이로 구정이나 코스를 미리 알려줬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주자가 2루에 있으면 투수의 그립과 포수 사인을 모두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얻은 정보는 리드하는 방식이나 양손의 움직임, 신체부의 터치 등 다양한 방법으로 타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사인 훔치기가 불법이지만, 야구에서 사인훔치기는 능력으로 인정받는다.

얀센의 고의 보크는 이런 가능성을 없애는 조치이기도 했고, 자신의 구위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zzang@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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