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용
북한 IOC위원 장웅과 남한 김운용 IOC위원(오른쪽)이 2002 부산아시안게임 태권도가 열린 첫날 구덕체육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스포츠서울DB)

[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 한국 스포츠를 빛낸 ‘시공 초월 라이벌’의 대미는 누구로 장식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명쾌한 답이 나왔다. 지금까지의 주인공이 각 종목을 대표하는 화려한 스타플레이어였다면 마지막 회는 한국 스포츠의 큰 밑그림을 그린 체육행정의 선각자들을 모시는 게 어떠냐는 체육계의 의견은 아둔한 필자의 고민을 단박에 해소해준 반가운 제안이었다. 시대를 앞선 통찰력과 혜안으로 한국 체육의 큰 그림을 그린 디자이너. 그들이 있었기에 한국 체육은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세계 스포츠의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한국 체육을 이끈 대표적인 체육 행정가라면 주저없이 두 사람을 꼽을 수 있겠다. 이견의 여지는 없다. 한 분은 ‘한국 스포츠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故) 민관식 전 대한체육회장이며 또 다른 한 사람은 한국 스포츠의 국제화를 이끈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이다. 한국 체육은 두 분이 있어 행복했다.

두 거목이 바통을 주고 받으며 체육계를 이끈 덕분에 한국 스포츠는 오늘의 영광을 맛볼 수 있었다. 민 회장이 정교한 설계와 탄탄한 기초공사로 한국 스포츠 근대화의 터전을 닦았다면 김 부위원장은 민 회장으로부터 넘겨받은 터전 위에 견고한 집을 지었다. 한국 체육은 시대를 앞선 두 거목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스포츠의 잠재력과 가치를 일찌감치 간파한 시대의 선각자로 한국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민관식
민관식 전 대한체육회장. (스포츠서울DB)

◇민관식 전 대한체육회장

영원한 체육인이다. 경성제일고보 시절 탁구 조선대표를 지냈고, 교토제국대학 유학시절에는 테니스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정계와 학계, 체육계 등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체육인의 긍지와 자부심이 남달랐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대한체육회장에 올라 1971년까지 한국체육을 이끌며 서울 무교동 체육회관과 태릉선수촌을 건립, 한국 스포츠 근대화의 토대를 닦은 게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1년 체육회장을 물러난 뒤 문교부장관이 된 뒤에도 스포츠의 교육적 가치에 주목해 많은 일을 했다. 스포츠 소년단과 소년체전 창설은 물론 체력장 도입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운명의 대한체육회장

학창시절 스포츠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민관식 회장이 대한체육회와 인연을 맺은 건 운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민 회장은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공화당 원내총무 언질을 받았다가 그 자리에 김용태 의원이 임명되면서 대한체육회장에 부임하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따라 체육회장직에 오른 그는 한국 체육의 백년대계를 위해 남다른 기획력과 불도저같은 추진력을 발휘했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만약 그가 공화당 원내총무에 임명됐다면 한국 체육의 오늘은 상당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국 체육의 입장에선 그의 원내총무 탈락은 큰 축복이 됐다.

▲체육행정의 민주화

민 회장이 체육계 수장으로 부임하기 전 대한체육회장은 그야말로 제왕적 권한을 누렸다. 당시 31개 산하 경기단체장을 체육회장이 직접 임명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체육회는 민 회장 부임이후 새 바람이 불었다. 각 경기단체의 임원 선출권을 구성원들에게 돌려주기로 하고 정관을 개정했다. 각 경기단체가 회장 부회장 이사 등을 스스로 선출한 뒤 체육회장의 인준을 받도록 하는 내용으로 정관을 고쳐 체육의 자율성을 보장했다. 체육행정의 민주화와 자율성은 민 회장의 손에서 시작된 셈이다.

체육회 직원들의 직업 안정성도 보장했다. 이전에는 직원들의 고용 안정성이 늘 문제가 됐다. 회장이 바뀌면 일자리가 바뀌거나 일터를 떠나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체육회 직원들의 책임과 소신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민 회장은 부임직후 이들에게 든든한 직장을 보장해 주기 위해 조직을 정비하고 인사,재무,서류 취급 등 사무관리에 대한 규정도 만들었다. 한국의 체육 행정은 민 회장 부임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은 짜장 틀린 게 아니다. 민 회장 부임이후 대한체육회는 비로소 체육행정의 기본틀을 마련했고,직업으로서 안정성이 보장된 전문 인력을 키워낼 수 있었다.

이형택
[스포츠서울 박진업기자]민관식(가운데) 전 대한체육회 명예회장이 지난 2004년 당시 테니스선수 이형택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보고 있다. upandup@sportsseoul.com
▲체육의 과학화

학창시절 탁구와 테니스 선수 출신. 그리고 교토제국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한 과학자 출신의 체육회장 부임은 한국 체육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됐다. 스포츠와 과학의 접목은 민 회장에겐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민 회장은 1964년 3월 올림픽 개최 예정지인 도쿄를 방문한 뒤 스포츠 과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일본 방문에서 인터벌 트레이닝, 웨이트 트레이닝, 텔레미터와 근전도 테스트, 트레드밀 등 낯선 용어와 개념을 접한 뒤 이를 적극 받아들였다. 선수 관리에 의학과 과학의 접목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한 민 회장은 대표선수들을 상대로 건강검진을 받도록 했다. 또한 국내 의학계 석학들을 모두 선수 훈련 현장에 배치했다. 선수들의 체력을 점검,관리하고 훈련장에서 일어나는 신체상 문제들을 해결하게 했다. 한국 체육 과학화의 선구자로서 그의 역할은 실로 컸다.

▲지도자 육성과 외국인 코치 영입

경기력은 선수의 능력 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코칭능력도 중요하다는 게 민 회장의 지론이었다. 경기인 출신의 회장답게 그의 눈은 예리했다. 주먹구구식의 코칭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그는 코치 강습회와 외국인 코치를 대거 영입했다. 반발도 컸다. 그러나 그는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1965년 6명을 시작으로 1966년 15명을 초청했다. 숙식비 외에 매달 1000달러 이상의 월급을 주는 출혈을 감수한 건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프라 구축과 기초종목 육성

체육계 숙원 사업인 체육회관과 합숙훈련장 건립은 그가 아니였다면 성취할 수 없었다는 게 공통된 견해다. 집권여당의 실세 의원에다 대통령과 친분관계,그리고 경기인 출신의 애정과 열정이 함께 녹아들면서 체육계의 숙원사업은 성취됐다. 1966년 6월 30일 서울 무교동에 초현대식 체육회관 건물이 개관됐고, 필생의 꿈이었던 태릉선수촌도 이날 오후에 기공식을 갖는 겹경사를 맞았다. 한국 스포츠는 태릉선수촌의 개촌과 함께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민 회장이 ‘한국 근대스포츠의 아버지’로 불리는 가장 큰 이유다.

그는 또 기초종목 육성에도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1964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육상과 수영 등 기초종목 부진을 뼈저리게 절감했기 때문이다. 이후 수영과 육상에 남다른 지원을 아끼지 않아 4년 뒤 1968 방콕아시안게임에선 뜻을 이뤘다. 양정고등학교 2학년생 조오련이 자유형 남자 400m와 1500m에서 거푸 금메달을 따냈고,육상 여자 투포환의 백옥자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마도 기초종목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쏟은 첫 체육회장은 민 회장이 아닐까 싶다.

시공초월(민관식vs김운용)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

풍운아다. 촉망받는 명문대학생으로서 맞이한 6.25 전쟁. 그는 청년 장교가 된 뒤 뛰어난 영어 구사능력을 앞세워 군인으로 커나가는 가 싶었지만 5.16 군사혁명이후 송요찬 내각수반 의전 비서관으로 일하다 중령으로 예편했다. 이후 주미대사관 참사관 등 외교관으로 변신했지만 이 또한 순탄치 않았다. 1968년 국내 복귀 후 경호실 소속(차장 1급)으로 근무하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시해사건으로 청와대를 떠났다. 24년만에 사인(私人)으로 돌아온 그의 삶에는 제2의 변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포츠 행정가로서 김운용의 신화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승승장구했다. 한국 스포츠도 덩달아 날개를 달았다. 1986년 IOC 위원으로 선출된 것을 비롯해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회장, 월드게임 창설회장, IOC TV·라디오 분과위원장, IOC 집행위원, IOC 부위원장 등을 맡아 국내외 체육계에서 맹활약했다. 2001년 유색인종 최초로 IOC 위원장 선거에 도전하기도 했다.

태권도의 세계화는 김운용의 존재를 빼놓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장 취임 이후 국기원을 건립하고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설했다.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도 IOC내 그의 영향력 덕분에 이뤄낼 수 있었다.

▲태권도의 체계화·세계화

1971년 태권도협회장에 오르며 체육계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태권도계는 30개 유파가 산재하는 통에 문제가 많았다. 김 부위원장은 태권도협회장직에 부임한 직후 태권도의 체계화를 우선과제로 삼았다. 우선 체계적으로 정립된 교본을 만들기로 했다. 지도관 관장이던 이종우 기술의장이 중심이 돼 태권도 교본을 발간함으로써 태권도 체계화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두번째는 태권도의 역사를 찾았다. 가라테의 변형이니 당수의 아류라는 세간의 비아냥을 잠재우기 위해 이론적 틀을 역사에서 찾는 작업에 나섰다. 화랑도 등 무수한 이론이 나왔으나 고구려 무용총의 벽화와 그 후 조선 때의 역사를 찾아내 태권도가 고구려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립했다.

무도가 스포츠로 자리잡게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김 부위원장은 그 답을 찾았다. 태권도의 세계화가 시대적 숙제라고 판단한 그는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를 창설했다. 무도 태권도의 역사성을 체계화하고 그 권위와 가치를 세우는 국기원과 국내 태권도의 경기력 향상을 꾀하는 대한태권도협회,그리고 WTF 등 세 개의 태권도 유관기관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면서 태권도의 국제적 위상을 끌어올린 그의 노력은 결국 세계 스포츠 무대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김운용
김운용 전 IOC 위원, 대한체육회 회장. (스포츠서울DB)

▲스포츠 외교관으로 변신

1974년은 김운용의 스포츠 인생에서 일대 전환점을 맞는 시기다. 그는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가 됐다. 대한태권도협회,국기원 원장, WTF 총재를 맡으며 태권도의 최고 수장으로 자리잡은 그였지만 아직 한국 체육 전체를 아우르는 수준에는 못미쳤던 게 사실이다. 그랬던 그가 1974년 대한체육회 부회장과 KOC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에 오른 사실은 자신의 외연을 확대하는 든든한 발판으로 작용했다. 영어 구사능력이 뛰어난 그는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려던 한국 체육의 인재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이때부터 그는 한국 스포츠 외교의 일선에 나서게 됐다.

그의 첫 임무는 1978년에 열리는 제 49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유치전. 박종규 당시 사격연맹 회장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그는 1974년 스위스 베른대회에서 열세를 뒤집으며 유치에 성공해 자신의 스포츠 외교역량을 과시했다.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유치는 한국 스포츠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올림픽 종목 세계대회를 훌륭히 치러냄으로써 1988 서울올림픽 유치의 든든한 밑거름이 됐기 때문이다.

▲IOC 입성과 승승장구

체육계 입성후 그는 승승장구했다. 군인과 외교관 시절,고비마다 불운에 발목이 잡혔던 그였지만 체육계에선 달랐다. 술술 풀렸다. IOC 위원 입성도 행운이 따랐다. 1984년 LA올림픽 기간에 열린 총회에서 새 IOC 위원이 된 박종규씨가 불과 1년 뒤인 1985년 11월 암으로 별세함으로써 차기 올림픽 개최지인 한국의 IOC 위원 문제가 대두됐다. 1988년 올림픽 개최국의 IOC 위원을 공석으로 놔둘 수 없었고 결국 그 행운이 자신에게 찾아왔다. 1986년 10월 17일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제91차 총회에서 IOC 위원으로 선출된 그는 이례적으로 피선과 동시에 총회에서 취임선서를 하고 곧바로 IOC 위원 활동을 시작했다. 행운은 계속 이어졌다. 그로부터 1주일 뒤에는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회장으로 선출되는 겹경사를 누렸다. 국제 스포츠무대에서 무서운 기세로 주목받은 그는 올림픽 직전인 1988년 8월 15일 서울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공석이 된 집행위원 2명을 뽑는 선거에서 당선의 영광을 누렸다. 6명이 입후보한 가운데 스웨덴의 에릭슨 위원과 함께 4년 임기의 집행위원에 당당히 뽑혔다. IOC 위원이 된 지 만 2년도 안 돼 집행위원에 뽑히며 세계 스포츠무대의 파워맨으로 급부상했다.

88서울올림픽 개최 10주년 기념식
김운용(가운데) 대한체육회장이 지난 1998년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88서울올림픽 개최 10주년 기념식에서 사마란치(왼쪽 두번째)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과 동판 제막식을 갖고 있다. (스포츠서울DB)

▲태권도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은 김 부위원장의 가장 큰 업적으로 손꼽힌다. 1994년 파리 IOC 총회는 서울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1981년 바덴바덴 IOC 총회에 버금가는 역사적인 무대가 됐다.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은 세계 스포츠사에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단시간에 이뤄진 큰 역사로 평가받는다.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겠지만 김운용이라는 큰 산이 없었다면 감히 넘볼 수 없는 쾌거였다. 김 부위원장은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립한 이후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이라는 큰 목표를 위해 정교하고도 치밀한 전략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세계선수권대회를 여러지역에서 개최해 태권도를 알렸고, 지역 연맹을 차례로 창설해 나갔다.

1975년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가입을 시작으로 1976년 국제군인체육회(CISM) 가입, 1980년 IOC 승인종목 채택, 1982년 아프리카게임 정식종목 채택, 1983년 팬암게임 정식종목 채택, 1986년 서울과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정식종목 채택, 1988년 서울과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시범종목 채택 등으로 차근차근 꿈을 키워갔다.

1994년 파리 IOC총회에서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여부를 결정할 당시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꿈은 이뤄졌다. ‘유사 종목은 올림픽 종목이 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가라테나 우슈의 견제도 심했다. 게다가 북한의 지원을 받고 있는 국제태권도연맹(ITF)의 방해도 만만치 않았지만 김 부위원장은 막강해진 영향력을 앞세워 만장일치로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을 이끌어냈다. 1년 전인 1993년 대한체육회장직까지 차지한 그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 IOC TV위원장, 세계경기연맹연합회(GAISF) 회장,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 등을 겸임하고 있어 명실공히 ‘체육 대통령’으로 불릴 만 했다.

▲동방불패의 몰락

1974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유치에 성공한 것을 시작으로 국제 스포츠무대에서 자신의 존개가치를 알리며 승승장구했던 김 부위원장은 2001년 모스크바 IOC 총회에서 뼈 아픈 패배를 맛보게 된다. 유색인종 최초로 IOC 위원장 선거에서 나섰던 그는 믿었던 사마란치에게 배신을 당하며 자크 로게에게 위원장 자리를 내줬다. 진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이후 국제 스포츠외교의 빠른 지각변동에 설 자리를 잃어갔다. 2002년 솔트레이크동계올림픽은 김 부위원장에겐 기억하기 싫은 끔찍한 사건이다. ‘솔트레이크 스캔들’로 자신의 계파였던 10명의 위원들이 IOC를 떠났고, 그 자신 또한 경고조치를 받는 등 IOC내에서 입지가 크게 흔들렸다. 결국 ‘솔트레이크 스캔들’은 2001년 IOC 위원장 선거의 당락을 결정한 뇌관으로 작용한 셈이다.

▲옥에 티

‘체육 대통령’으로 불린 그는 2000년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정치권에 발을 내디디면서 그의 불행은 가속페달을 밟았다. 2003년 프라하 IOC 총회에서 평창의 2010년 동계올림픽 유치 탈락의 불똥이 김 부위원장에게 튀었다. “IOC 부위원장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 평창 유치를 방해했다”는 비난속에 ‘체육 대통령’의 입지는 줄어들었고, 결국 2004년 1월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되며 급추락했다. 유죄가 확정된 그는 2005년 5월 영어(囹圄)의 몸으로 IOC에 사표를 내며 화려했던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쓸쓸히 떠났다. 한국 스포츠의 국제화에 가장 크게 기여했던 그의 스포츠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게 뼈 아프다.

고진현기자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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