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동열 전 KIA 감독은 한국 프로야구 사상 가장 뛰어난 투수로 꼽힌다. 1985년 데뷔한 선동열은 선발투수로도 완벽했지만 90년대 초반부터 마무리로 돌아서면서부터는 그야말로 ‘언터처블’이었다. 경기 중반 이후 그가 불펜에 등장하면 상대 더그아웃에서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는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해태 사령탑이었던 김응룡 감독은 때로는 상대를 압박하고 심리적인 부담을 가중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등판 계획에도 없는 선동열이 불펜에서 몸을 풀도록 했다.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도망치게 했다는 삼국지의 한 대목을 연상케하는 장면이다.
그런 선동열은 삼성에서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또 한 명의 ‘언터처블급 괴물’을 탄생시켰다. ‘돌부처’ 오승환(한신)이다. 오승환이 삼성 유니폼을 입던 시절에는 수시로 ‘수업끝’을 알리는 학교종 차임벨과 함께 ‘라젠카 세이브 어스’의 웅장한 사운드가 대구구장에 울려퍼졌다. 오승환의 등장곡인 ‘라젠카 세이브 어스’는 그날의 야구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신호였다. 오승환은 ‘마무리 선동열’의 데자뷔였다.
한국 프로야구를 주름잡은 뒤의 행보도 닮았다. 과거 선동열이 그랬던 것처럼 오승환도 지난 시즌 일본무대에 진출해 성공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신화적인 마무리투수와 현역 최고의 마무리투수, 과연 누구를 ‘최고의 끝판왕’으로 꼽을 것인가.
|
◇전천후 폭격기 선동열
중학교 시절에도 빠른 공을 던지는 것으로 유명했던 선동열은 광주일고 3학년 때였던 1980년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다. 고려대 입학 이후에는 좋은 식단과 체계적인 운동으로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고 구속과 구위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선동열을 오랫동안 지켜본 이들은 그의 구위가 가장 좋았던 시기도 대학 1, 2학년 때였다고 입을 모은다. 스피드건에 155㎞는 쉽게 찍었다는 것이다. 대학 1학년 때에는 제1회 세계청소년 선수권대회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고 국가대표로도 뽑혔다. 이듬해에는 서울에서 벌어진 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대표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일본과의 결승전에서도 2회 2점을 내준 뒤 추가 실점없이 마운드를 지켜 5-2 역전승을 일궈냈다. 대회 MVP도 그의 몫이었다.
1985년 후반기부터 프로 무대에 등장해 7승4패 8세이브 방어율 1.70으로 대물다운 데뷔시즌을 치렀다. 이듬해엔 24승6패 6세이브 방어율 0.99로 다승, 방어율, 승률 등 투수 부문 3관왕에 올랐다. 1988년부터 3년 연속 투수 3관왕을 차지하는 등 ‘지존’에 등극한 선동열은 1992년 어깨 건초염이라는 암초를 만났다. 당시 김응룡 감독은 부상에서 회복한 선동열을 당분간 불펜에서 활용하다 선발로 복귀시킬 계획이었으나 ‘마무리 투수’ 선동열의 매력에 빠져 1993년부터는 그를 전문 마무리 투수로 활용했다.
1996년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유니폼을 입은 뒤로도 ‘최고 마무리’의 명성은 고스란히 이어졌다. 첫 해 부진을 딛고 이듬해 38세이브를 기록하며 ‘나고야의 태양’, ‘주니치의 수호신’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1999년 주니치가 일본시리즈를 제패할 때는 마지막 투수로 마운드를 지켰고 정상에서 명예롭게 은퇴를 선언했다.
|
◇끝판왕으로 길들여진 오승환
선동열이 정통 엘리트 코스를 차례로 밟아갔다면 오승환의 야구 인생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오승환이 처음 야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대영초 5학년 때였다. 포수와 내야수를 전전하던 오승환은 우신중 3학년때야 투수로 대성할 가능성을 보였다. 당시 구속이 시속 138㎞까지 찍혔다. 한서고 1학년 때는 구속이 143㎞까지 향상됐다. 그러나 또래보다 빠른 공을 던지던 그의 팔꿈치는 더 빠르게 손상됐다. 통증은 경기고로 전학한 2학년때 더 심해졌고 오승환은 마운드 대신 외야로 나가야 했다. 그런 오승환을 눈여겨본 이가 바로 당시 단국대 사령탑 강문길 감독이다. 중학교 시절 오승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강 감독은 오승환을 데려가 다시 투수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내 시련이 다시 시작됐다. 1학년 말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은 것이었다. 강 감독은 오승환이 완벽하게 재활할 때까지 기다렸다. 오승환은 3학년 가을부터 마운드에 올랐고 4학년 때는 춘·추계 대회에서 6승을 거뒀다. 그 해 신인지명에서 삼성에 2차 1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일찌감치 겪어낸 험난한 과정은 전화위복이 됐다. 고교와 대학시절 혹사당하지 않은 그의 어깨는 싱싱했고, 재활을 하면서 웨이트트레이닝으로 키운 근육은 강철같이 단단했으며,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인내심과 부동심을 갖게 됐다. 불펜에서 공 몇 개만 던지고 곧바로 마운드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어깨가 빨리 풀리는 체질도 그가 ‘끝판왕’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2005년 데뷔와 동시에 불펜에서 막강한 위력을 보인 오승환은 시즌 중반에는 선배 권오준을 밀어내고 마무리 자리를 꿰찼다. 이듬 해 오승환은 47세이브를 기록하며 ‘오승환 시대’를 열어젖혔다. 그의 가장 큰 후원자는 바로 선동열이었다.
|
◇ 닮은듯 다르다
둘은 참 닮은 구석이 많다. 시속 150㎞를 쉽게 넘기는 강력한 직구를 갖췄고 주로 사용하는 변화구도 슬라이더다. 포크볼 계열의 떨어지는 변화구를 장착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지만 투수로는 손이 작고 손가락도 짧은 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번번이 실패했다. 대신 강한 악력을 바탕으로 손이 작은 콤플렉스를 넘어 최고 투수로 발돋움했다.
투구의 메커니즘은 판이했다. 선동열은 부드러웠다. 타고난 유연성을 최대한 활용해 볼을 타자와 가장 가까운 지점까지 끌고 나갔다. 릴리스 포인트가 다른 투수들에 비해 훨씬 앞쪽에서 형성되다보니 타자들은 마치 선동열이 자신의 눈 앞에서 투구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스트라이드를 하면서 왼쪽 허벅지와 가슴이 붙어버릴 정도로 자세를 낮추고 릴리스를 했기 때문에 볼은 땅바닥에 깔리듯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했고 타자들이 제대로 공략할 수가 없었다.
오승환은 선동열에 비해 체격이 작고 유연성도 떨어진다. 그러나 레슬링 선수 못지 않은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한다. 간결해 보이지만 온 몸에 저장한 근육의 파워를 볼에 실어 뿜어낸다. 강한 허리 힘과 하체가 폭발적인 피칭이 안정적으로 이뤄지도록 탄탄하게 받쳐준다. 여기에 타자의 타이밍을 교묘하게 뺏는 이중키킹 동작이 곁들여진다. 오승환은 왼발을 땅에 한번 스치듯 하면서 내딛는데 이 동작 때문에 타자들이 호흡을 맞추기가 어려워진다. 한때 보크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동작이 아니라 일관된 투구폼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 직구는 오승환, 변화구는 선동열
오승환은 전형적인 ‘투피치’ 투수다. 그러나 더 깊숙히 파고들면 그저 ‘직구 하나’ 뿐인 투수에 가깝다. 가장 자신있는 직구로 정면승부를 펼친다. 오승환의 투구는 거의 90% 정도가 직구다. 스스로도 인정한다. 뻔한 승부지만 상대 타자는 알고도 그의 직구에 손대기가 어렵다. 그래서 그의 공은 ‘직구’가 아니라 ‘돌직구’다. 빠르면서 묵직하고 위협적이다. 오승환을 마무리 투수로 조련한 선동열도 “직구만 놓고 보면 오승환이 나보다 한 수 위”라고 인정했을 정도다.
|
직구의 비결은 강한 악력과 독특한 그립이다. 최근 오승환은 한 TV의 예능프로그램에서 사과를 가로로 쪼개는 괴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볼을 쥘 때 손가락만을 사용하고 릴리스하는 순간에 엄지로 강한 스핀을 더한다. 스포츠통계 전문회사인 스포츠투아이가 PTS(Pitch Tracking System)로 측정한 오승환의 직구는 1초당 회전수가 47.92회로 리그 평균 41.78회보다 6바퀴나 많았다. 강력한 백스핀이 걸린 볼은 중력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초속과 종속의 차이가 크지 않고 마치 타자 앞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스피드의 공을 던지더라도 오승환의 볼이 훨씬 위력적인 이유다.
선동열의 전성기 때는 최근과 같이 정밀한 측정시스템이 없었다. 오승환의 볼과 간접비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투수를 겪어본 선수들의 증언 뿐이다. 선동열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레전드급 타자들은 하나같이 “지금까지도 선동열만한 직구를 던지는 투수가 없다”고 증언한다. 한문연 NC 2군 감독은 과거 “특급 투수들도 초속과 종속 차이가 10㎞ 이상인데 전성기 때의 선동열은 그 차이가 5㎞도 되지않았던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오승환의 초속과 종속 차이는 시속 9㎞ 안팎이다.
|
선동열에게는 직구보다 더 위력적인 마구가 있었다. 오승환은 직구 외에 슬라이더를 구사한다. 떨어지는 구종을 장착하기 위해 반포크볼을 연마했지만 실전에서 크게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오승환의 변화구는 그저 직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액세서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선동열의 슬라이더는 달랐다. 검지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중지로만 실밥을 강하게 잡아채는 독특한 그립으로 던졌는데 다른 투수들의 슬라이더에 비해 스피드도 압도적이었지만 휘어져 나가는 각도가 엄청났다. 홈플레이트를 향하는 듯하다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질 정도로 변화가 컸다.
선동열은 일본 진출 이후에는 직구와 슬라이더 외에도 슬로 커브를 장착해 재미를 보기도 했다. 150㎞의 직구를 노리고 있는데 100㎞ 안팎의 커브가 뚝 떨어지니 타자들이 타이밍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아직 오승환은 새로운 변화구 레퍼토리를 만들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오승환은 이제 일본에서 첫 시즌을 마쳤고 필요에 따라 구종을 추가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있다.
|
◇ 마무리 기록으로 따져 본 비교우위는?
선동열은 1992년부터 마무리 전업을 시도해 1993년에는 완전히 마무리 투수로 정착했다. 마무리 투수라고는 하지만 선발로 등판하지 않는 투수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선동열은 그 해 49경기에서 무려 126.1이닝을 던졌고 10승3패 31세이브에 방어율 0.78을 기록했다. 국내에서 최고 성적을 거뒀던 1995년에는 48경기에서 109.1이닝을 던져 5승3패 38세이브를 기록했다. 방어율은 0.49로 기적에 가까운 수치였다.
오승환은 붙박이 마무리로 자리잡은 2006년 47세이브를 거뒀고 수술 후 재활에 성공한 2011년 또다시 47세이브를 달성했다. 2006년에는 63경기 79.1이닝 동안 거둔 성적이었고 2011년에는 54경기 57.0이닝만에 달성했으니 오히려 수술 이후의 마무리 임팩트가 훨씬 강해졌다고 볼 수 있다. 방어율도 2006년의 1.59에서 2011년에는 0.63으로 뚝 떨어뜨렸다.
선동열은 일본 진출 첫 해에는 부진을 겪었지만 2년째인 1997년 38세이브를 거두며 주니치의 ‘수호신’으로 각광받았다. 방어율도 1.28에 불과했다. 오승환은 지난 해 한신 유니폼으로 갈아입자마자 무서운 적응력을 보였다. 64경기에서 2승 4패 39세이브로 단숨에 선동열의 세이브 기록을 갈아치웠다.
|
이상 세 시즌의 기록을 종합적으로 비교해보면 선동열과 오승환의 차이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타자들이 더 상대하기 까다로운 쪽은 선동열이었다. 마무리 투수의 최고 덕목인 실점에서 오승환보다 앞섰다. 오승환에 비해 훨씬 많은 이닝을 소화해 내구성도 뛰어났고 자책점이 적어 방어율에서 오승환을 압도했다. 한국프로야구에서 400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들 가운데 선동열은 가장 평균 방어율(1.20)이 낮은 투수다. 그 뒤를 평균 방어율 1.69의 오승환이 따르고 있는데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투수는 이 두 명 뿐이다.
경기당 피안타수에서도 선동열이 비교 우위에 있다. 1993년과 1995년, 1997년 선동열은 9이닝 한 경기로 환산했을 때 경기당 3.42개, 4.03개, 5.12개의 안타를 내줬다. 2006년과 2011년 2014년의 오승환은 각각 4.88개, 4.26개, 5.54개다. 피홈런에서는 더욱 차이가 두드러진다. 한국에서의 선동열은 오승환에 비해 두 배에 가까운 이닝을 책임지면서도 피홈런수에서는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일본 진출 2년째인 1997년에는 놀랍게도 단 한 개의 홈런도 허용하지 않았다. 지난 해 오승환은 5개의 홈런을 맞았다.
그러나 위압적인 느낌은 오승환이 강했다. 힘으로 타자를 윽박질러 선동열보다 빠른 탈삼진 페이스를 보였다. 2006년과 20011년 오승환은 이닝당 1.37개와 1.33개의 삼진을 잡았는데 선동열의 이닝당 탈삼진은 1993년과 1995년 각각 1.30개와 1.28개였다. 일본 진출 이후에도 비슷했다. 선동열이 1997년 이닝당 1.09개의 삼진을 잡은 반면 오승환은 2014년 이닝당 1.22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제구력은 막상막하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
◇당신이 감독이라면 누구를 택할 것인가
선동열의 과거와 오승환의 현재를 모두 지켜본 이들에게 답이 없는 질문을 던졌다. 만약 당신이 감독이고 선동열과 오승환 가운데 하나를 마무리로 데려갈 수 있다면 누구를 택할 것인가?
삼성 류중일 감독은 선동열의 손을 들었다. 단지 선동열의 공은 직접 상대해봤고 오승환의 공은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류 감독은 “선 감독님의 공을 쳐보지 않은 현역 선수들이라면 오승환을 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면서 “홈런도 안타도 때리기는 했지만 선 감독님은 마치 눈 앞에서 내 머리를 향해 공을 던지는 것 같았다. 타자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직구 구위도 빼어났지만 빠르게 도망가버리는 슬라이더가 오승환보다 훨씬 좋았다”고 말했다.
KIA 김기태 감독은 “나라면 무조건 선 감독님을 쓴다”고 답했다. 그는 “오승환도 최고지만 구위나 경험에서 선 감독님이 한 수 위다. 선 감독님은 정말 내 눈 앞에서 공을 던지는 것 같았고 직구다 싶어서 방망이를 돌리면 슬라이더가 들어왔다. 그 정도로 ‘쿠세’(특정한 구종을 던질 때 드러나는 일종의 버릇)가 없었다. 선수들 얘기로는 볼 회전은 오승환이 더 좋다고 하는데 선 감독님 공도 만만치 않았다”고 돌이켰다.
LG 양상문 감독은 “둘 다 장단점이 있다. 선 감독은 바깥쪽 직구에 이어 주무기인 슬라이더로 승부를 마무리했다. 빠져나가는 공으로 헛스윙을 유도하는 편이었는데 오승환은 몸쪽 승부도 과감하게 한다. 주무기가 직구라 돌아가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는 스타일이다. 굳이 말하자면 오승환이 더 공격적인 투구를 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전체적인 수비 능력에서는 선 감독이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다. 번트 수비와 견제에서는 오승환이 선 감독을 따라갈 수 없다”고 덧붙였다. 피칭 자체로는 난형난제지만 종합적인 마무리 투수로의 능력은 선 감독이 낫다는 뉘앙스다.
넥센 염경엽 감독은 “마무리로 쓴다면 오승환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오승환이 선 감독님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감독 입장에서는 최적화된 기용을 고려해야 한다. 선 감독님은 겸업이 가능했다. 특급 마무리이기도 했지만, 스타일 자체는 선발에 가깝다. 우선 투구 메카닉이 선발형이다. 그리고 던질 수 있는 구종이 오승환에 비해 많은 장점이 있다. 그런면에서 오승환은 구위, 구종, 투구 메카닉이 전형적인 마무리형 투수”라고 설명했다.
현역 시절 선동열과 오승환의 볼을 모두 상대해본 몇 안되는 타자 가운데 하나인 양준혁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도 오승환에 한 표를 던졌다. 양 위원은 “선 감독님의 공이 훨씬 묵직했던 것 같다. 끝까지 볼을 끌고 나와서 던지다보니 체중이 다 실려있었다. 배트가 힘에서 밀리는 느낌이었다. 오승환의 공도 묵직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다만 강한 악력과 손목 스냅으로 엄청난 회전을 걸어서 볼끝이 아주 좋다. 눈에 보이는대로 정확하게 때렸다 싶은데도 정타가 나오지 않는다”고 둘의 차이를 설명한 뒤 “선 감독님은 직구 외에도 완벽한 슬라이더를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오승환에게는 대단한 배짱이 있다. 절대 떨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지만 마무리 투수에게 가장 중요하다. 나는 수많은 타격 기록을 세웠지만 긴장을 많이 했던 편이라 솔직히 큰 경기에서 실력발휘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승환은 오히려 그런 경기에서 자기가 갖고 있는 것 이상의 실력을 발휘한다”고 말했다.
박현진기자 jin@sportsseoul.com
기사추천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