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5년 차 ‘믿보배’의 못 말리는 연기 열정
신인배우의 ‘오뚜기’ 근성…천상배우 선택한 예견
국가·인간·욕망·본질 관통하는 ‘예술의 힘’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배우 이규형(42)은 다양한 매체에서 다채로운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천의 얼굴’로 불린다. 사실 오래전부터 공연계에서는 ‘믿고 보는 배우’로 위상을 굳히며 ‘초연 전담 배우’로 꼽힌다. 그는 특정 장르에 연연하지 않는다. 배우로서 그가 서 있는 모든 현장이 바로 무대다.
이규형은 현재 출연 중인 뮤지컬 ‘팬레터’를 비롯해 현재 ‘글루미데이(現 사의찬미) ‘은밀하게 위대하게’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편’ ‘사랑의 불시착’ ‘한복 입은 남자’ 등의 시작을 함께했다. 초연에 대한 부담이 크지만, 배우라면 누구나 서고 싶은 개막 공연의 주인공으로서 여러 작품을 책임졌다.
그의 인생 절반은 무대에서 펼쳐졌다. 고등학생 시절 연극반, 동국대 연극학과에 이어 경찰청 의무경찰 복무 중에도 ‘호루라기’ 연극단을 통해 공연에 올랐다. 대학 졸업 전부터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걸었고, 현재 ‘국민 배우’로 불리며 실력파 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다.
장르불문 이규형을 찾는 매체들이 많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매년 그가 지키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일 년에 한 번은 반드시 무대에 오르는 것이다. 그는 “특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늘 무대에 서 왔던 사람이다. 무대에 안 서는 게 어색할 정도”라고 강조했다.

◇ 경주마처럼 달린 배우에게 하늘이 전한 ‘heart attack’
이규형의 연기 열정은 대학 시절부터 소문이 자자하다. 그의 후배들에 의하면 당시 교수들이 외면했던 뮤지컬 장르를 밀어붙여, 결국 해당 수업까지 만들었다. 이규형은 “아니다”라고 손사래 쳤지만, 그때를 기억하는 후배들에게는 지금까지도 ‘영웅’과 같은 존경하는 선배다.
대학생 시절 대학로로 오가며 지하 소극장부터 뿌리를 다졌다. 그 뿌리는 굵고 단단한 가지를 뻗어 거대한 나무로 성장했고, 이젠 선후배들과 함께 공연계에 울창한 숲을 이뤘다. 이규형은 “후배들이 나보다 잘난 놈들이다. 물어보면 대답하지, 묻지도 않는데 조언하는 스타일은 아니다”라면서도 “조금만 부지런하면 오디션 보면서 대학로 작품하고, 영화·드라마도 다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매체에 부딪히는 것도 좋지만, 노래를 좀 한다면 대학로의 문도 계속 두드려보라고 얘기했다”라고 전했다.
모든 조언은 이규형의 직접 경험에서 나왔다. 22세에 데뷔한 연극 ‘두근두근 내 인생’ 출연 당시 공연을 마친 후 심장마비와 같은 통증을 느껴, 대학로 거리의 벤치에 20~30분 누워 안정을 취했던 적이 있다. 극 중 원 캐스트로 진행됐고, 학교생활도 병행하고 있어 공연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건강상 휴식을 향해 손가락질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규형은 곧바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무대에 올랐다. 절실하고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회가 왔을 때 잘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노하우 없이 몸뚱어리와 패기밖에 없었다”라며 “무대 위에서 미친 듯이 목숨 걸고 뛰어다녔던 것 같다. 그땐 앞뒤 없이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작품에 임했다. 지금은 2~3시간 공연을 끌고 가면서 어느 정도 완급조절을 할 수 있게 됐다”라고 신인 배우의 패기를 드러냈다.

◇ 관객에게 온전히 맡긴 ‘작은 거인’의 섬세한 기세
이규형과 ‘팬레터’의 스토리가 닮았다. 작은 역할과 규모에서 대배우와 대극장으로 확장된 필모그래피가 이들의 10년간 여정에 고스란히 담겼다.
지금에서야 ‘팬레터’가 K-뮤지컬 브랜드로서 일본과 대만 등에 진출했지만, 초연 당시엔 300석 규모의 동국대 이해랑 예술극장에서 시작했다. 삼연까지 중극장 규모의 공연장에 올랐다. 지난해 10주년 기념 공연 기준으로 정확하게 역사의 절반 시점에서 대극장 작품으로 입봉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건 이규형과 ‘팬레터’가 가진 신념이다. 이규형은 “졸업 이후 모교의 극장에서 작품을 올린다는 것부터 의미가 있다”라고 처음부터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극장 규모에 따라 연기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극장에서 놓치기 쉬운 사소한 연기적 디테일을 찾아서 승부해야 한다. 작은 움직임 및 동선 하나하나를 대극장보다 섬세하게 보여줄 수 있는 크기의 차이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배우들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관객들은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 관객이 느끼는 게 정답”이라며 “미세한 표현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즐거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런지 ‘팬레터’ 공백기엔 일상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이런 지점이 나의 성향과 맞아떨어졌다”라고 덧붙였다.
배우들도 이들의 서사가 관객석 맨 뒤 좌석, 2~3층까지 도달하도록 손끝과 발끝의 섬세함을 더했다. 이규형은 “스스로 극장이 바뀌었다고 크게 체감되는 부분은 없었다. 하지만 효율적으로 동선을 쓰기 위해 다운 스테이지 무대를 극에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사용하려고 했다. 또 그림자 액팅 때 좀 더 명확한 표현을 위해, 그냥 연기가 아닌 어떻게 비치는지에 대해 집중했다”라며 공연의 완성 과정을 말했다.

◇ 작품이 선사하는 카타르시스…시대·국경 초월 공감 뮤지컬
이규형은 ‘팬레터’를 미국 브로드웨이나 영국 웨스트엔트 작품을 뛰어넘는 대표 한국 창작 뮤지컬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넓어진 공연장 규모는 그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 대만에 이어 역사로 인해 정치적으로도 지속 충돌하는 일본까지 매료시킨 작품이라는 점이 미래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2024년 일본 공연을 직접 관람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규형은 “일본의 이찌방(최고) 연출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배우들과 1930년대 역사를 공부하면서 일본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고 지금 무엇을 뉘우치고 있는지, 또 역사를 잊지 말고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전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팬레터’는 그 시절 핍박을 견디면서 살아가고 죽어간 예술가의 이야기라며, 그렇기 때문에 한 글자 한 글자를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라고 한일 배우들 모두 울컥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해외 공연장에서 ‘팬레터’를 관람한 관객들의 발걸음이 한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행히 이번 10주년 기념 공연이 열린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내 모니터가 설치돼있어 실시간 자막으로 해외 관객들의 이해를 도왔다. 덕분에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메시지와 감동이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닿아 심금을 울렸다.
그는 “이게 예술의 힘인 것 같다. 국가 상관없이 관통하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고 느꼈다. 시대가 지나도 고전 작품이 남아있는 이유와도 같다고 생각한다”라며 “‘팬레터’는 한국 문화의 위대함을 대변한다”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단순히 유행처럼 특정 분야 앞에 ‘K(Korea)’를 수식어처럼 붙이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규형은 “현재 한국 뮤지컬은 전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에 올라 있다. 일단 시도와 역량 자체가 대단하다. 무대, 조명, 의상 등 외적으로는 잘 보여지고 있다. 이제 구슬을 잘 꿰서 예쁘게 만드느냐가 관건이다”라며 “까도 까도 인재가 많아 계속 나온다”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첫선을 보인 ‘한복 입은 남자’와 ‘몽유도원’을 예로 들며 “모든 초연은 다듬어져야 완성도가 높아진다”라며 “‘한복 입은 남자’는 그 정도 투자로 그만한 사이즈로 만든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시도였다. ‘몽유도원’도 정말 재밌게 봤는데, 이 또한 전부 훌륭하신 분들이니 또 하나의 작품이 나오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팬레터’도 10년 동안 갈고 닦아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전했다.
이규형은 앞으로도 ‘팬레터’와의 지속적인 동향을 약속했다. 그는 “10년이라는 쉽지 않은 기회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하다”라면서 “사실 재미없었으면 안 했을 텐데, 정말 재밌다. 솔직한 마음으로 ‘해진’ 역이 안된다면 작품을 보고 싶지 않을 것 같다”라고 제작사를 향해 힘주어 이야기했다.
현재 이규형의 시선은 ‘팬레터’의 스크린 및 브라운관 진출을 겨냥하고 있다. 그는 “‘팬레터’가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장르에 따라 완전히 다를 것 같다. 영화라면 뮤지컬 영화가 매력적이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시리즈물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라고 너스레를 떤 후 “1930년대는 아픈 시대지만 매력적인 경성을 보여준다. 고통과 갈등을 소재로 극적인 재미와 감동을 전할 수 있을 같다”라고 강력 추천했다.
오랜 시간 작품의 정체성을 흔들림 없이 지켜온 시대와 국경 초월 뮤지컬 ‘팬레터’는 오는 6월7일까지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gioi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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