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마다 눈 크게 뜨고 봐야 할 관전 포인트
‘세훈’의 고백, ‘해진’은 그의 정체를 눈치챘는가?
뮤즈·완성·용서가 전하는 ‘진심’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최근 10년간 이규형(42)의 배우 인생이 바뀐 것처럼 그만의 뮤지컬 ‘팬레터’의 ‘김해진’도 점점 진화하고 있다. 시즌마다의 변화가 아니다. 공연마다 ‘역대급’이라는 호평을 받는다. 매회 다른 포인트를 던져 관객들의 회전문을 자극한다.
이규형은 “10년 전 단순히 대본에 쓰여있는 대로만 ‘해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매 시즌을 보내면서 ‘무엇을 더 새롭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인물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이나 역사를 찾아보게 됐다”라며 “지난 시즌에서 인물 간의 관계성에만 집중했다면, 이번엔 또 다른 특별한 지점이 있을지 고민했다”라고 전했다.
과거엔 쉽지 않았지만, 최근엔 인공지능(AI)에 도움을 받는다고. 덕분에 과거 문인들과의 관계도 수월하게 찾을 수 있어, 상대 인물을 대하는 태도 또한 달라졌다. 이규형은 “새롭게 찾아낸 관계성을 바탕으로 연기하기에 매번 새로워진다. 10년 동안 해온 역할이지만 지겹지 않고 늘 새로운 이유”라고 설명했다.
시즌마다 핵심 포인트도 다르다. 예를 들어, ‘해진’이 숨을 거두기 직전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겠다는 각오로 펼친 공연 후엔 사랑에 목마른 스토커의 모습,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의미 있게 보내려는 마음 등으로 다채롭게 표현 중이다.
단, 이규형의 ‘해진’은 “무엇을 해도 결국 이 인물”이라는 것. 이규형은 “‘이게 맞나’라는 불안감보단, 과정을 거듭할수록 내가 무엇을 해도 ‘해진’이 했을 법한 고민이고, 희로애락이겠다는 생각이 확신을 주는 것 같다”라며 “이런 해석들이 쌓여, 이젠 매 순간 ‘해진’ 안에 녹이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 ‘히카루’ 향한 연모 vs ‘천재 문인’의 완벽한 작품
‘팬레터’를 관람한 관객들의 궁금증 중 하나는 ‘해진’이 ‘히카루’의 정체를 이미 알았는지다. 순수하고 외골수인 성격인 데다 사랑에 금방 깊이 빠지는 ‘해진’일지라도, 존재 여부도 확실치 않고 생명을 갉아먹는 인물에게 모든 걸 쉽게 내어주기 때문이다. 작품의 핵심 스토리이지만, 현실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위험한 선택이기에 빠져들면서도 의문을 가지는 부분이다.
‘해진’을 연기하는 이규형도 어떻게 관객들을 설득할지에 대해 매회 고민한다. 극 중 가장 중요한 장면이기에, 이규형은 인물의 행동은 대본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다만, 공연마다 미세한 차이를 던져 관객들은 물론 상대 배우에게도 다른 감정 연기를 펼치고 있다.
그는 “최근 공연하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라며 “중요한 건 인물의 생각과 호흡, 움직임에 따라 달라진다”라며 “거울 씬에서 ‘세훈’과 ‘히카루’가 지지고 볶고 싸울 때 잠들어있기도 했다. 때론 눈 뜨고 바라보기도 한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혼란스러운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다”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심리전은 ‘천재 문인’으로서의 자세로 나아간다. 이규형은 “생명을 잃어가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지점”이라며 “초연부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내 글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사모의 감정이 싹텄다. ‘해진’이 세상에 없을지라도, 세상에 이름 석 자가 빛날 수 있는 작품 하나를 남길 수 있어야 한다는 마음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이규형의 ‘해진’의 진실은 2막에서 드러난다. 그는 “두 사람을 쳐다보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속이고 있던 지점”이라며 “작품의 끝을 맺을 수 있느냐 없느냐와 일맥상통한다. 더 아프고 더 절실한 상황인데, 하필 작품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뭔가 날려버린 듯한 ‘세훈’에게 배신감부터 오만가지 감정이 든다. 여기까지 가기까지 시한부의 삶 안에서 작품을 만들어내겠다는 마음이 가장 크다”라고 말했다.

◇ 순수한 영혼의 마지막 페이지…엇갈린 운명의 장난 ‘진심’
이규형은 ‘해진’의 삶을 배우의 인생과 공통분모로 엮었다. 화려하지만 때론 외로운 예술가의 길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가 연기하는 ‘해진’의 선택은 ▲뮤즈 ▲작품의 완성 ▲용서 등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엮였다.
아직 연모한 상대를 뮤즈로 만난 적 없지만, 다른 경우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한 이규형은 “문인이라고 해서 모든 장면이 어마어마할 것 같진 않다고 생각했다”라며 “배우뿐 아니라, 음악가 등은 사랑하는 사람을 뮤지로 삼아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부럽다. 그래서 ‘세훈’에게도 ‘(네가 그런 사람을) 만나본 적 없어서 그래’라고 말하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해진’의 심리를 일상에서 찾았다. 예를 들어, 메시지의 답장이 안 와서 안절부절못했던 경험이나 가장 친한 친구와 수다 떠는 모습을 그림처럼 그렸다.
더불어 ‘해진’은 김유정을 모티브로 탄생한 인물이지만, 분명히 이규형만의 결이 묻은 캐릭터 색깔을 입혀야 했다. 자기 삶에 대입해 풀어낸 이규형은 “살얼음판을 걸을 걸 알면서도, 관계가 부서지고 깨지는 게 무서워서 모르는 척했던 경험도 있다. 심지어 관계가 깨졌을 때 내가 놓치는 지점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했다”라며 “‘이윤’이 ‘해진’에게 ‘좀 더 살고봐야 할 것 아니냐?’라고 해도 ‘지금 이게 살아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글을 완성해나가는 순간이 살아있다고도 생각하는 인물”이라고 전했다.
또한 ‘세훈’이 ‘히카루’인 그것을 눈치채고 있지만, 이를 덮으려는 마음도 가슴 깊숙이 숨겼다. 이규형은 “관계가 깨지는 순간, 내가 그린 아름다움도 깨져 글조차 쓰지 못할까 봐, 그러면 글을 완성하지 못하고 끝날까 봐 두려운 것”이라며 “작품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얼마나 이걸 완성하기 위해 절실하고 끔찍했을까 싶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조심스레 걸으면서 불안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지막 ‘진심’은 죽음 직전 ‘해진의 편지’에 담았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해진’의 선택은 결국 ‘세훈’이기 때문이다.
‘세훈’의 고백을 되새긴 후 그에게 편지를 쓴 ‘해진’을 떠올린 이규형은 “‘세훈’과 ‘히카루’의 속임에 감겨 넘어간 인물이다. 둘을 용서하는 지점까지 오만가지 생각으로 흔들리지만, 끝엔 용서하는 지점에 다다른다. 작가로서 천재성을 지닌 ‘세훈’이 못다 한 작품을 끝내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라며 “‘세훈’이 문인으로 살아남아서 우리의 정신을 이어갔으면 하는 진심이다. 이는 7인회의 대화들이 모두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이러면서 용서가 됐다”라고 전했다.
‘문화통치’를 표방한 민족 말살적 통치가 심화됐던 일제강점기, 끝까지 펜으로써 사랑과 지조를 꿋꿋이 지켜낸 ‘팬레터’는 오는 6월7일까지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gioi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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