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인구밀도를 기록한 ‘무법지대’

충킹맨션과 함께 홍콩의 ‘양대 마굴’, 극단적 빈곤과 무질서 상징

[스포츠서울 | 이상배 전문기자] 동서양 문화가 교차하는 도시 홍콩, 침사추이와 홍콩섬 사이를 가로지르는 빅토리아 하버(Victoria Harbour)를 중심으로 빽빽이 들어선 마천루는 이 도시의 현재를 상징한다.

란터우섬의 홍콩 디즈니랜드, 타이포의 황대선사, 영화 속 단골 배경인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와 소호 거리까지, 홍콩은 화려함과 세련됨의 대명사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이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공간이 있다. 바로 구룡성구에 위치한 ‘구룡채성 공원’이다. 오늘날 이곳은 시민들이 산책을 즐기는 평화로운 도심 공원이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인구밀도를 기록한 ‘무법지대’였다.

‘구룡채성’의 기원은 송나라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적의 위협으로부터 소금 등 지역 산물을 보호하기 위한 해상 방어 기지로 건설됐다. 1842년 제1차 아편전쟁 이후 난징조약 체결로 홍콩섬이 영국에 할양되자, 청나라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으로 이곳을 활용했다.

1898년 신계 지역이 영국에 99년간 조차(Concession)되면서도 ‘구룡채성’만은 청나라 영토로 남았다. 이에 따라 이곳은 사실상 ‘치외법권’ 지대가 됐다. 행정과 관할권을 둘러싼 청과 영국의 갈등 속에서 통치 공백이 이어졌고, 20세기 초 결국 영국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홍콩을 점령한 일본군은 성벽을 철거해 인근 카이탁 공항 확장 자재로 사용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났지만, 이어진 국공내전으로 대규모 중국 난민이 홍콩으로 유입됐다. 행정 공백 상태였던 ‘구룡채성’에는 1947년까지 2000여 명이 무단 정착했고, 이후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면적 0.03㎢(잠실야구장 절반)에 불과한 공간에 최대 약 5만 명이 거주했다. 이는 1㎢당 약 170만 명이라는 전례 없는 인구밀도였다.

건물은 계획 없이 위로만 증축돼 최고 15층까지 올라갔고, 햇빛이 들지 않는 좁은 통로와 방들이 미로처럼 얽혔다. 위생과 안전은 심각한 수준이었고, 무자격 의료인과 불법 영업이 난무했다.

1950~1960년대 구룡채성은 홍콩 당국의 실질적 통제 밖에 있었다. 이 틈을 타 중국 폭력조직 삼합회가 세력을 확장했다. 마약 거래·불법 도박·성매매가 공공연히 이뤄졌고, 경찰의 대규모 진입이 아니면 단속조차 어려운 무법천지 ‘성역’으로 불렸다.

1973~1974년 홍콩 경찰은 3500회 이상의 대대적 급습을 단행해 2500명 이상을 체포하고 1800kg이 넘는 마약을 압수했다. 이후 범죄율은 점차 감소했고, 1983년에는 치안이 통제 가능 수준에 이르렀다는 공식 선언이 나왔다.

1984년 중국과 영국이 공동선언 이후 홍콩 반환이 가시화되면서 ‘구룡채성’ 문제도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1987년 중국과 영국은 구룡채성 철거를 공식 발표했다.

홍콩 정부는 약 3만3000명의 주민과 사업자에게 총 27억 홍콩달러 규모의 보상금을 지급했고, 일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1991~1992년 강제 퇴거가 이뤄졌다.

1994년 4월까지 완전 철거가 진행됐고, 그 자리에 오늘날의 ‘구룡채성 공원’이 조성됐다. 일본 건축학자들이 철거 직전 복잡한 내부 구조를 기록해 학술 자료로 남겼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구룡채성’은 한때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의 배경과 맞물려 언급되곤 하는 충킹맨션과 함께 홍콩의 ‘양대 마굴’로 불렸다. 화려한 금융·관광 도시의 이면에 존재했던 극단적 빈곤과 무질서의 상징이었다.

오늘날 ‘구룡채성 공원’은 정갈한 전통 정원 양식으로 복원돼 과거의 흔적 일부만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국가 간 외교 갈등, 전쟁과 난민, 주권 공백, 그리고 인간 생존 본능이 뒤엉켰던 현대사의 축소판이 묻혀 있다.

홍콩의 스카이라인이 빛나는 이유는 어쩌면 이처럼 어두웠던 시간을 통과해 왔기 때문일지 모른다. 화려함과 암흑이 공존했던 공간, ‘구룡채성’은 오늘도 묵묵히 그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sangbae0302@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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