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친상도 미루고 무대 지킨 사람…‘천생 배우’ 이순재의 마지막 퇴장

[스포츠서울 | 배우근 기자] 한국 대중문화의 한 시대를 통째로 버틴 마지막 장인이 눈을 감았다.
연기 인생 70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대를 향해 서 있던 배우 이순재가 25일 새벽 별세했다. 향년 90세.
이순재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데뷔한 뒤, 단 한 번도 연기를 내려놓지 않은 ‘현역’이었다.
그에게 무대는 직업이 아니라 의무였다. 2008년 모친상을 당하고도 “무대는 관객과의 약속”이라며 장례를 미루고 공연을 올렸던 일화는 그의 신념을 보여준다.

말년에도 그는 누구보다 뜨거웠다.
지난해까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KBS 드라마 ‘개소리’ 촬영을 병행하며 “피곤해도 무대에 서면 힘이 난다”고 말하던 현역 중의 현역이었다.
그 열정으로, 그는 2024 KBS 연기대상에서 역대 최고령 대상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당시 그는 “공로상이 아닌, 실력으로 받았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순재가 남긴 필모그래피는 한국 방송사의 진화 과정과 함께 한다.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는 가부장 시대의 상징이었고, ‘허준’, ‘상도’, ‘이산’은 한국 사극 전성기를 이끌었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근엄함을 벗어던지고 코믹한 ‘야동 순재’ 캐릭터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꽃보다 할배’에서는 ‘직진 순재’라는 별명을 얻으며 예능에서도 세대를 넘어 사랑받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존재를 상징하는 장면은 무대였다.
87세에 올린 연극 ‘리어왕’에서 그는 200분 가까운 대사를 단 한 줄 틀리지 않고 완주해 “살아있는 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연극인들은 “이순재는 연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연기 그 자체인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는 정치권에도 잠시 몸담았다.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중랑갑에서 당선됐고, 한일의원연맹 간사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정치는 내 길이 아니다”라며 다시 무대로 돌아왔고, 이후에는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최근 몇 달간 건강 이상설이 이어졌지만, 대중은 그가 다시 무대로 돌아오길 기대했다.
지난달 ‘2025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배우 정동환이 “오늘은 이순재 선생님이 오지 못했다. 건강이 걱정된다”고 말하며 분위기는 숙연해졌고, 결국 걱정은 현실이 됐다.
마지막 순간까지 연기를 놓지 않았던 배우.
무대 위에서 가장 강했고, 카메라 앞에서 가장 빛났으며, 후배들에게는 누구보다 엄격했지만 누구보다 따뜻했던 어른.
그렇게 이순재는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연기는 스크린이나 무대가 아니라 대중의 기억 속에서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kenny@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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