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혹독한 논란은 성장의 밑거름이었다. 배우 수지가 감정이 부재한 사이코패스로 ‘감정 연기 마스터’의 경지에 다가섰다. 도전을 포기하지 않은 행보 끝에 얻은 결과물이다. 넷플릭스 ‘다 이루어질지니’는 완성형 연기자를 향한 힘찬 도약이다.
수지 연기의 강점은 감정 전달에 있다. 연기자로서 전환점이 된 쿠팡플레이 ‘안나’에선 거짓으로 점철된 삶에서 풍겨나오는 불안을, 넷플릭스 ‘이두나!’에선 지독한 고독함을, 영화 ‘원더랜드’에선 옛모습을 잃고 돌아온 남자친구에게 느껴지는 공허함을 표현했다. 발성이나 발음에서 지적이 있었을지언정, 인물이 가진 감정선은 빈틈없이 짚었다.
지난 3일 공개된 ‘다 이루어질지니’에선 무기를 버렸다. 영화 ‘건축학개론’과 KBS2 ‘함부로 애틋하게’ 등 에서 은은히 보였던 ‘국민 첫 사랑’의 이미지도 지웠다. 섬세하게 감정을 짚었던 능력을 역으로 ‘감정을 덜어내는 기술’로 치환했다. 학습된 선함으로 살아가는 사이코패스 기가영을 만나 새로운 얼굴을 창조했다.

기가영은 983년 동안 경력을 잃은 램프의 요정 지니(김우빈 분)를 우연히 꺼낸 인물이다. 집요한 지니의 요청 끝에 세 가지 소원을 빌게 된다. 기가영은 할머니의 주입식 교육으로 인해 평생 올바른 선택을 학습하며 살아온 탓에, 표정은 물론 목소리 톤까지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다. 감정 이입이나 공감이 결여된 채 살고 있다. 극도의 절제된 연기가 요구됐다.
반대로 지니는 극단적인 능글맞음으로 임한다. 쉴새없이 말을 쏟아내고 피곤한 반박을 이어갔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귀찮게 했다. 질릴수밖에 없는 새 얼굴에 기가영은 철저한 무표정으로 반응했다. 요상한 사투리를 쓰며 다가오는 지니에게 기계적인 반응으로 일관하는 기가영의 리액션은 ‘다 이루어질지니’의 창의적인 재미를 만들었다.

수지의 연기는 후반부에 돋보인다. 지니를 통해 점차 감정을 학습해 간 기가영은 할머니의 죽음 이후 눈물을 흘렸다. 김은숙 작가도 꼽은 ‘다 이루어질지니’의 명장면이다. 극도의 절제 끝에 터진 감정 연기엔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이후 인간성을 알고 싶다며 세 번째 소원을 비는 장면에선 오열할 수밖에 없는 짙은 감정이 전달됐다. 무표정으로 이어진 응축된 감정이 분출한 지점이다. 수지가 외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캐릭터의 심리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늘 로맨스에서 얼굴을 내비쳤던 수지는 이번 김우빈과 호흡도 완벽에 가까웠다. ‘함부로 애틋하게’ 이후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능글맞음’과 ‘철벽’이 부딪치는 관계를 통해 유쾌한 티키타카를 이끌었다. 폭주에 가깝게 몰아치는 지니의 에너지를 무감각한 얼굴로 받아내는 초반부에선 유연성도 엿보인다. 철저히 계산된 연기 전략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수지는 한층 깊어진 연기력으로 장르적인 스펙트럼을 넓혔다. 판타지 장르는 물론 드라마틱한 이야기에서도 매력을 한껏 드러냈다. ‘다 이루어질지니’에서처럼 어느 시대든, 어떤 옷이든 잘 어울리는 배우로 성장했다. 더 큰 기회가 생길 것이라는 기대가 감돈다. 다음 스텝이 궁금해질 뿐이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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