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박효실기자] 생명을 구해준 의사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자필시집을 선물하는 환자. 하지만 그 ‘명의’는 장장 20년간 아내를 속이고 첫사랑과 남몰래 애까지 ‘싸질러놓고’ 뻔뻔하게 이중생활을 해왔다. 당돌한 혼외자가 이 사실을 폭로하면서 온가족이 막장불륜을 알게됐고, 이제 문제의 의사는 ‘분노의 화신’이 된 아내와 맞닥뜨릴 일만 남았다.

JTBC 주말극 ‘닥터 차정숙’이 차근차근 쌓아온 ‘불륜 발각’ 빌드업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며 지난 7일 방송된 8회에서 자체 최고 시청률 16.2%(닐슨코리아 기준)를 돌파했다. 예고편에서 차정숙(엄정화 분)은 서인호(김병철 분)에게 시원하게 생일빵을 안기고 가출해버렸다.

폭풍 전개가 이어지며 시청률은 수직상승 중이다. 이렇게 대박이 날 줄 누구도 몰랐던 드라마의 선전이다. 방송 전 공개된 줄거리만 놓고보면 ‘닥터 차정숙’은 흥행요인보다 실패요인이 더 커보였다.

‘20년 차 가정주부에서 1년 차 레지던트가 된 차정숙의 찢어진 인생 봉합기를 그린 드라마’라는 한줄 설명처럼 이 드라마는 40대 주부 차정숙이 돌연 레지던트가 된 뒤 벌어지는 좌충우돌을 그렸다.

여기서 ‘위험요소’는 정숙의 남편인 구산대병원 대장항문외과 과장 서인호(김병철 분)와 가정의학과 교수 최승희(명세빈 분)가 오랜 불륜 관계이고, 뉴욕에서 온 훈훈한 이식외과 전문의 로이킴(민우혁 분)이 정숙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정도다.

중견들로 구성된 주연배우를 지나 젊은 배우로 눈을 돌리면 같은 병원에 근무 중인 정숙의 아들 서정민(송지호 분)과 전소라(조아람 분) 커플 정도인데, 시청률을 견인할 스타 캐스팅이라고는 보기 힘든 조합이다.

하지만 다소 뻔해 보였던 줄거리와 잔잔한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닥터 차정숙’은 첫 회 4.9%의 시청률로 시작해 4회만에 10%를 넘더니 8회만에 3배 이상의 시청률 상승을 일궈내며 근래 보기 드문 흥행질주 중이다.

목숨이 오가는 절체절명의 상황과 의료진의 헌신, 환자의 치유 등 기본 설계가 극적인 의학 드라마(이하 ‘의드’)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시청률은 담보할 수 있다. 하지만 ‘닥터 차정숙’에는 성공한 ‘의드’에서, 특히 한국 ‘의드’에서 보기 힘든 재미요소가 박혀있다. 바로 명의라는 완벽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예정된 결론으로만 달려가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닥터 차정숙’에도 의사로서 존경받는 실력파는 존재한다. 서인호, 최승희, 로이킴, 전소라는 일만 놓고보면 최고의 인물들이다.

하지만 인간으로 놓고 보면 서인호는 의사씩이나 돼서 피임도 하지 않고 2명의 여자를 임신시키는 사고를 쳤고, 제 마음 가는대로 20년간 불륜을 저지른다. 자신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된 아들과 고3인 딸에게 명문대를 나와 의사가 되라고 강요하지만,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서인호의 ‘엘리트 주의’는 산산이 부서지는 중이다.

대학병원 교수로 재직 중인 최승희는 첫사랑을 빼앗긴 분노를 보상하듯 서인호의 아이를 몰래 낳아 출산하고, 기어이 그를 자신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빠 자리로 데려오기 위해 뻔뻔한 행각을 이어간다. 어찌보면 막장 요소가 가득한데 이는 기존의 ‘한국형 의드’에서는 감히 상상 못할 전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실력이 뛰어난데 인품도 훌륭한 의사, 실력은 부족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의사, 실력이 나쁜 주제에 인품도 엉망인 의사 정도가 ‘의드’ 속 인간 군상이었다. 하지만 ‘닥터 차정숙’ 속에서는 직업이 의사일 뿐 속물스럽고 뻔뻔하고 유치한 인간들이 민낯을 연신 드러내며 웃음을 안긴다.

그리고 그 중심엔 눈빛과 걸음걸이까지 차정숙 그 자체인 엄정화의 감수성 짙은 열연이 있다. 하룻밤의 실수로 아이엄마가 되고 20년간 전업주부로 살았던 차정숙은 급성간염으로 죽을 고비에 처했다가 간이식을 받고 각성했다.

가족만이 전부인줄 알았던 인생이 무너지며, 성공한 전업주부에 만족했던 자아가 기지개를 켠다. ‘선물’처럼 받은 두번째 인생은 심장이 뛰는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누구 하나 응원하는 사람도 없는데 그렇게 46세에 레지던트가 됐다.

젊고 똑똑한 의료진들 사이에서 ‘구박댕이’ 신세라는게 조금 안쓰러운 부분인지만, 알고보면 차정숙은 일반인들의 눈에 상위 0.01% 인생이다.

의대를 졸업해 의사국가고시를 합격한 인재인데다 대학병원 외과과장 사모이자 의사 아들도 뒀다. 게다가 얄밉거나 말거나 시어머니는 건물주다. 그런 차정숙의 인생이 이토록 폭넓은 공감과 치유를 준 이유는 뭘까.

파렴치한이나 속물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하기엔 복잡하고 다면적인 성향을 가진 캐릭터들을 구현해낸 공감가는 대사와 이를 뛰어난 연기력으로 설득한 배우들의 힘이 컸다. 특히 엄정화의 진정성 넘치는 연기는 많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진심의 응원을 불렀다.

가수로 데뷔한 엄정화는 연기 경력 30년차 배우다. ‘결혼은 미친짓이다(2002)’ ‘싱글즈(2003)’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홍반장(2004)’ ‘댄싱퀸(2012)’ ‘미쓰와이프(2015)’ 등을 통해 꾸준히 영화에서 관객들을 만났다.

하지만 안방극장에서는 미니시리즈 주연으로서 존재감이 엷어져가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오십대가 넘은 배우, 그것도 여배우에게 돌아오는 드라마 속 역할은 한계가 뚜렷했다. 그에게 ‘닥터 차정숙’은 tvN ‘마녀의 연애(2014)’ 이후 장장 9년만에 미니시리즈 주연작이다.

지난해 방송된 tvN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웃겼다 울렸다 눈물 콧물을 쏙 빼놓은 오미란으로 열연을 펼친 그가 기어이 미니시리즈의 견고한 벽을 뚫은 셈이다. 9년만의 주연작에서 엄정화는 맞춤옷 같은 차정숙을 통해 대체 불가 매력을 발산 중이다.

좋은 배우는 태어나지 않는다. 개인의 인생과 노력이 영글어지며 비로소 두번째 세번째 빛을 발산한다. 엄정화의 ‘개화’가 박수받는 이유다.

gag11@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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