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글·사진 | 보령=원성윤 기자] 노트북을 덮고 고개를 들면 탁 트인 옥빛 바다가 펼쳐지고, 해안도로를 따라 무리 지어 핀 분홍빛 꽃망울이 짭조름한 해풍에 흔들린다. 삭막한 사무실의 파티션을 벗어나, 여행지의 여유 속에서 업무와 휴식을 동시에 경험하는 워케이션(Workation)이 새로운 근무 제도로 주목받고 있다. 충남 보령의 섬들은 이제 단순한 피서지를 넘어, 일과 쉼 그리고 생태적 성찰이 어우러지는 생동감 넘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중이다.

대천항에서 뱃길로 약 1시간, 화살이 꽂힌 활 모양을 닮은 삽시도는 충남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선착장에 내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울창한 송림 사이로 싱그러운 흙내음이 훅 끼쳐온다.

충남 보령 삽시도가 워케이션의 성지로 주목받는 이유는 명확하다. 직장인 중심으로 진행되던 제도의 혜택을 프리랜서까지 활짝 열어젖혔고, 무엇보다 파격적인 가성비가 눈길을 끈다.

삭막한 사무실을 벗어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일하는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란 어렵지만, 이곳에서 치르는 비용은 놀라울 만큼 가볍다. 바다가 가장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28석 규모의 공유 오피스와 펜션형 숙소를 이용하며, 숙박과 업무 공간, 체험 프로그램에 든든한 아침 조식까지 포함된 2박 3일(2인 기준) 참가비가 단 3만~4만 원 수준이다. 일정을 넉넉히 늘려 4박 5일을 머물러도 5만~6만 원이면 충분하다.

이러한 ‘가성비 워케이션’의 뼈대에는 침체된 마을을 살리기 위한 섬 주민들의 각고의 노력이 깃들어 있다. 삽시도어촌체험휴양마을 임미자 사무장은 “섬마을 특성상 육지에 비해 경비 부담이 커 평일 관광객을 유치하기가 쉽지 않았다”며 “마을 주민들과 협의해 연계 숙소 숙박비를 과감히 낮추고, 3만 원이라는 부담 없는 자부담금으로 조식을 포함한 새로운 2박 3일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마을 자체적으로 와이파이 설치와 호텔식 침구류 교체, 자전거 비치 등 방문객의 쾌적함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은 결과, 2025년에는 전년 대비 방문객이 53%나 증가하는 성과를 거뒀다.

쾌적하게 집중도 높은 업무를 마친 뒤에는 치유의 숲 자전거 여행을 떠나거나, 낙지 잡이와 바지락 캐기 등 삽시도만의 다채로운 생태 체험을 넉넉하게 즐길 수 있다. 임 사무장은 “도시민이 직장을 떠나 진정한 힐링을 할 수 있도록 잡는 재미와 먹는 행복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단, 이 알토란 같은 삽시도 섬 워케이션은 주말과 계절 성수기를 제외한 주중에만 온전히 누릴 수 있다.

모니터 앞을 떠나면 삽시도의 대자연이 두 팔을 벌려 환영한다. 남북으로 이어진 5km 길이의 둘레길은 고요한 솔숲과 백사장, 갯벌을 따라 걷는 환상적인 트레킹 코스다. 하루 두 번 조수에 따라 섬에서 분리되는 ‘면삽지’, 썰물 때 바위틈에서 생수가 솟아오르는 ‘물망터’, 솔방울을 맺지 못하는 ‘황금곰솔’ 등 삽시도 3경은 트레커들에게 잊지 못할 벅찬 감동을 선사한다.

해안가 산책 중 주워 온 버려진 해양 유리나 폐조개껍질은 실내 업사이클링 체험을 통해 나만의 훌륭한 인테리어 소품이나 액자로 재탄생한다. 임 사무장은 “해양 유리 조각 등을 주워오면 체험비의 20% 할인을 진행하고 있다”며 “비용도 절감되면서 참가자 본인 스스로 깨끗한 해변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는 생각에 만족도가 매우 높다”고 귀띔했다.

삽시도에서 눈을 돌려 인근 고대도로 향하면, 투명한 바다 위로 깊은 역사의 숨결이 파도친다. 선착장 입구에서 웅장하게 방문객을 반기는 철제 범선 조형물 ‘GOD愛島(고대도)’와 해안가 산책로에 조성된 거대한 목조 선박 모형이 이 섬의 특별한 정체성을 웅변한다. 태안해안국립공원에 속한 고대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 유적지다.

1832년 7월 17일, 독일 선교사 칼 귀츨라프는 서양 선박 로드 애머스트호를 타고 고대도에 20일간 머물며 주민들에게 한문 성경과 약품을 나누어 주었다. 이때 한글을 배운 그는 이듬해 동아시아 항해기를 통해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영어권과 독일어권에 최초로 알리는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안항에 세워진 귀츨라프 기념공원과 고대도 선교센터 내부에는 당시의 발자취를 생생히 기리는 유물과 전시실, 세미나 공간이 잘 갖춰져 있어 섬 전체가 거대한 역사 체험장과 같다.

이 아름다운 보령의 섬들은 다가올 미래의 글로벌 예술 무대로도 변모를 준비하고 있다. 2027년 4월 3일부터 5월 30일까지 원산도와 고대도 일원에서는 ‘움직이는 섬 사건의 수평선을 넘어’라는 주제로 제1회 섬 비엔날레가 열린다. 24개국 70여 명의 작가가 참가해 해안도로와 빈집, 창고 등 섬 곳곳을 조각과 설치 예술 작품으로 채울 예정이다.

치열했던 일과 낯선 섬에서의 낭만적인 휴식을 뒤로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 세계 최초 한옥식 온돌마루 좌석을 갖춘 서해금빛열차에 몸을 싣는다. 따뜻한 방바닥에 다리를 뻗고 누워 창밖으로 붉게 물드는 서해의 낙조를 바라보면, 바쁘게 달려온 생활의 무거운 배낭이 서해의 고요한 파도에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socool@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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