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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조병모기자] 22일 향년 88세로 서거한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정치사에 한획을 그은 정치인이다. 문민정부, 변절, 금융실명제, 두 전 대통령 처벌, IMF 금융위기 등이 그에게서 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1927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1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1951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 장택상 전 국회부의장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54년 김 전 대통령은 제 3대 총선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만 26세로 당선됐다. 지금도 깨지지 않는 최연소 기록이다. 여당 의원으로 시작했지만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추진하자 자유당을 탈당해 기나긴 야당 정치인 생활을 시작했다.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쿠데타를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1969년 초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를 맡고 있던 그는 자택 인근에서 괴환들에게 일명 ‘초산테러’라고 불린 사건을 당한 뒤 배후를 박정희 정권으로 지목하면서 정권과의 갈등을 더욱 키워나갔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김대중 전 대통령, 이철승 전 의원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으나 당내 경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 패해 고배를 마셨다. 1974년 신민당 총재에 선출된 김 전 대통령은 유신체제를 강력히 비판했다. 1979년 YH 여공 신민당사 농성 사건을 이유로 박정희 정권은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의원직을 제명하고 가택연금했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운동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도 계속됐다. 김 전 대통령은 1983년 광주 5·18 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23일간의 단식투쟁을 실시했고 이듬해에는 민주화운동추진협회의를 발족시켜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웠다. 이는 1987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 쟁취로 이어졌.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의 동지이자 영원한 맞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직헌제 개헌을 계기로 사이가 벌어졌다. 두 사람은 제 13대 대통령 선거에 모두 나섰으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며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에게 승리를 내줬다.
김 전 대통령은 1990년 ‘3당 합당’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자신이 이끌던 통일민주당을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쳐 민주자유당을 창당한, 소위 ‘3당 합당’으로 민주화 진영으로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거세게 받았다.
1992년 민자당 대선 후보로 나와 대통령에 당선된 김 전 대통령은 문민정부를 기치로 내걸고 32년간의 군사정권을 끝냈다. 군의 사모임인 하나회를 해체하고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비자금 수사를 벌여 처벌까지 이끌어냈다. 또 금융실명제 도입, 차명 계좌 단속 등 경제 분야에서도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임기 말기에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bryan@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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