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옥석은 물에 의해 이동되면서 마모되어 둥근 형태를 띠는 작은 돌을 총칭하는 단어다. 쉽게 말해 예쁜 돌이다. 물가의 돌에 그치지 않고 건축물에 활용됐다. 문화강국의 중심인 국내 연예계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옥석이 즐비하다. 실력과 매력이 충만하지만, 아직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았을 뿐, 언제든 대중에 사랑을 받을 만한 재능이 많다. 예리한 눈으로 옥석을 건져보겠다는 야심찬 각오로 연재한다. <편집자주>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짜릿한 눈빛, 기세가 야무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애마’ 속 스크립터 수진(유유진 분)이다. 가운 하나 걸친 남자와 좁은 방에서 단둘이 있음에도 조금의 어색함이 없다. 경계심도 없다. 한 두 번 하는 일이냐는 듯 경쾌한 손놀림으로 붕대와 가위만 챙길 뿐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남자배우가 팬티를 입었느냐다. 자국이 생기면 지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화가 좋아도 쓸데없는 이유로 퇴근이 늦어지는 건 바라지 않는다. 성기에 붕대를 감으라는 지시에는 조금의 감정이 없다. 흔들림도 없다. 메마른 톤으로 남자배우에게 ‘공사하는 법’을 알려줬다.

잠시 방심하는 사이 남자배우의 거대한 그것이 눈앞에 나타났다. 무색무취의 공기가 확 바뀌었다. 느닷없이 빨간빛이 넘실댔다. 수진의 또렷하던 눈빛도 변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취한 듯 흐려졌다. 살포시 남자의 얼굴로 시선을 돌리며 “혼자 못 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말을 읊조렸다. 뜻밖의 인연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애마’ 3회, 유유진은 2분이 되지 않는 이 장면을 완벽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타인에게 심드렁한 채 일에만 몰두하던 스크립터가 거대한 것으로 인해 사랑에 빠지는 묘한 순간을 정확하게 짚었다. 이후 모두가 신주애(방효린 분)에게 몰두할 때 홀로 남자 배우를 챙겼다. ‘내 남자는 내가 챙긴다’는 뜨거운 감정이 엿보였다. ‘애마’의 작은 재미 포인트다.
대충 말려도 일하기 편한 파마머리에 땀에 절은 듯 편안한 작업복만 잘 어울리는 배우가 아니다. tvN ‘미지의 서울’에선 화려하다. 고등학교 시절 미지(박보영 분)와 미래(박보영 분)의 단짝이었지만, 어느덧 소원해진 박지윤으로 나왔다. 누가 봐도 매력적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열등감으로만 꽉 차 있는 답답한 친구다.
자신을 예뻐하지 못하며 굳이 안 해도 되는 거짓말을 일삼고, 괜한 시기와 질투로 자신의 길을 걷지 못했다. 자신이 관심을 가지면 미래가 채간다는 이상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자기 일에만 집중해도 충분히 사랑스러운데 스스로 망가뜨렸다. 못나고 미운 역할이지만,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나쁜 심보에 해당해서인지 불쾌까지 가진 않는다. 열등감마저도 기세 좋게 표현하는 재능이 유유진에게 있다.

아직 경험이 많지 않으나, 타율이 높다. 2017년 단편영화 ‘시월의 장미’로 제19회 부산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다. 연극 ‘비프’(2000)와 ‘아마데우스’(2023)와 ‘겟팅아웃’(2023) 무대에 섰다. SBS ‘낭만닥터 김사부3’와 ENA ‘남남’ 그리고 ‘미지의 서울’ ‘애마’까지, 참여하는 작품마다 화제가 되고 있다.
국내에서 여배우를 캐스팅하는 안목이 가장 높다고 평가받는 권오현 앤드마크 대표는 보자마자 ‘진짜 배우’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오디션 영상 몇 개만 보고도 궁금증이 일었고, 실제로 보고 나선 묘한 눈빛에 매료됐다고 했다. 경험이 많지 않음에도 빠르게 전속 계약을 맺게 된 배경이다.
열등감이든 기세든 뭐든 어울린다. 화려하거나 촌스럽거나 마찬가지다. 날카롭고 예민한 기운도, 순진한 얼굴로 남자에게 푹 빠진 얼굴에도 생동감이 있다. 어딘가 주변에서 있을 법 같은 자연스러운 외모 덕에 영화나 장르물에 더 어울릴 것 같다. 이미지면 이미지, 연기면 연기, 더할 나위 없는 옥석이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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